2018년에 발레를 처음 보기 시작해 관람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을 때, 당해 11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한한 마린스키 발레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돈키호테를 공연했었다. 그때가 발레라는 게 이렇게 재밌고 멋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직관했던 때 같다. (당시 키트리는 빅토리아 테레쉬키나, 바질은 한국의 김기민이었다.) 그 당시 내가 바질=김기민이었기 때문에 이번 유니버설발레단 돈키호테를 보러 갔다가 실망하지는 않을까 조금 고민을 했었다. (유비씨의 바질이 기대가 안됐다기보다는, 김기민의 바질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ㅠㅠ 전 유비씨 서포터즈였다구요ㅠㅠ 나 유비씨 조와훼ㅠㅠㅠ)
올해의 유비씨 돈큐 포스터! 향기리나가 포스터메인이었다
돈키호테는 3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돈키호테 아저씨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여관 주인 딸인 키트리와 이발사 바질의 이야기다. 키트리의 아버지인 여관 주인아저씨는 돈 없는 이발사 바질을 탐탁해하지 않아서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데, 여기 돈키호테가 나타나 젊은 연인의 사랑을 도와주는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실제 돈키호테 이야기에서는 아주 일부분이라고 들었다.
호두까기 인형과 돈큐가 입문용 전막 극으로 좋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돈큐를 훨씬 추천한다. 발레를 원래 했던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은 발알못의 시선을 잘 이해하지 못할텐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돈큐가 발알못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요소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한다. 플라멩코와 집시 춤을 응용한 캐릭터댄스와 강렬한 폴드브라의 발레는 클래식 발레임에도 발알못들의 시선을 끌만한 매력적인 요소다. 게다가 유비씨의 경우 문훈숙 단장님께서 공연 전 마임과 발레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는데, 이게 정말 큰 매력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배운 발레 마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다른 작품을 볼 때도 도움을 받으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입문자들에게 좋은 작품을, 기본지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공연 캐스팅을 고를 때 내가 가장 먼저 고려하는 건 역시 내 스케쥴이지만(....) 최대한 강미선 수석의 공연을 가려고 해왔다. 그런데 올해 미선수석이 임신을 하면서(!) 키트리 라인업에 오르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아니 왜 주역에 미선수석이 없지?!라고 의아했지만 이내 소식을 듣고 너무 축하할 일이라 아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찐부부케미를 보여줄 수 있을 법한 손유희X이현준 페어의 공연을 보기로 했다. 현준리노는 원래도 상당히 미남이라고 생각해서 원래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작년 오네긴에서는 미선수석이 너무 보고싶어서ㅠㅠㅠ(그리고 미선수석의 타티아나와 탁네긴을 보며 오열하다가 집에갔던 스칼랫..) 선택하지 않았던 캐스팅이었다.
유희리나와 현준리노는 실제로 부부라고 한다 :D 그 케미가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발레를 관람하러 다닌지 3년 정도 되었는데, 지금까지 본 전막극 중 돈키호테는 조금 특이하다. 남자캐릭터에게 미운 구석이 없다. 지젤의 알브레히트는 보는 내내 분노가 끓어오르게 하는 개자식이고, 얼마전 본 라바야데르의 솔로르는 재고따지는 인간저울같은 놈이었는데(.....) 백조의 호수 지그프리트는 지 여친 얼굴도 구별못해서 딴 여자한테 등쳐먹히질 않나 (흑흑 제발 오빠들아..ㅠㅠㅠ), 오네긴은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놈이고ㅠㅠㅠ 그런데 바질은 능글맞고 천연덕스럽다.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도 않고 오히려 키트리가 다른 남자들과 춤추는 모습을 보며 질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말 사랑스러운 남자캐릭터다. 키트리도 마찬가지다. 다른 전막극에서는 진즉 폐기처분했어야할 놈들을 붙잡고 늘어지며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바보같은(...) 여자들과 달리 춤추고 싶은 남자와 춤추고 돈많은 남자가 꼬셔도 '얘쨰럐구~ 시러~~'하는 표정으로 대차게 거절하거나,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발을 밟아버리면서 반항하는 등 하고싶은 대로 하는 여자캐릭터. 심지어 바질이 뽀뽀해달래도 자기 기분 안내키면 안해주는 깜찍한 밀당의 고수다.
사실 현준리노는 내 이상형이랑 되게 가깝다... (... 크흡...) 이상형이 내가 젤 좋아하는 바질했네...ㅠㅠ
솔직히 말해서 마린스키 발레단의 돈큐와 비교하면 테크닉이 훨씬 떨어졌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키트리와 바질이 너무 귀여워서 아쉽지 않았다. 유희리나는 작고 귀여운 새 같은 느낌이었다. 현준리노는 내가 발레를 보러다니면서 봤던 몇안되는 아름다운 피지컬을 가진 남자분 중 하나였다. 개인적으로는 피지컬이 좋아서 아름다운 무용수보다는 키가 작거나 비율이 좀 안좋아도 고난도 테크닉을 소화할 수 있는 아크로바틱한 무용수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테크닉이 좋은 사람을 볼 때 키나 비율같은게 잘 안보이는 편이다. 이를테면 지난 심청공연의 해적에서 '와 저사람 잘한다 멋있어'하고 고개를 들어서 보면 여지없이 시화이리노와 선우리노였다. (... 거의 탐지견 수준) 현준리노의 턴은 5바퀴도 엄청 스무스하게 돌고 되게 신기하긴 했지만 마린스키 때 김기민이 뛰면서 나를 혼절하게 만들었던 그런 점프들은 없었다. (현준리노가 키가 커보였는데, 그 키로 그렇게 높은 점프를 뛰는 건 쉽지 않은일일 것 같긴하다) 돈큐는 희극발레임에도 기민리노의 높은 점프를 보면서 인간이 저런 높이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정말 많이 울다 나왔다.
그리고 향키트리 흉내낸 스칼랫. 몰랐는데 팔방향 다틀림 크흡ㅠ
키트리에게 시도때도 없이 뽀뽀해대려고 하는 현준리...아니 바질...이나.. (......) 키트리 아버지가 '돈도 없는게!!'라고 윽박지르면 '않이~~~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아~? 제가 많이 벌어올게요~ 장인어른~(으쓱)'하며 맞받아치는 연기, 자살연기로 소동을 부리며 죽은 척을 하는 그 귀여움은 정말ㅠㅠ 감당이 불가했다 아유ㅠㅠㅠㅠㅠㅠ 점프 많이 못뛰어도 저렇게 멋있고 귀여우면 다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해봤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화이리노가 왕자님 하는 걸 한번만 꼭 보고싶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눈엔 멋있는 분이고...ㅠㅠ 귀여운 건 원래 잘하실거 같은데 끙..)
전막극을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했다가, 내내 지루했다고 이야기할까봐 (=우리엄마 얘기..) 선뜻 가자고 말을 잘 못하는 편이다. 돈큐는 분명 모두 좋아할텐데!라고 생각이야 했지만 나는 마린스키 돈큐를 한 번 본게 다라서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확실한 것 같다. 돈큐는 누구나 좋아할만한 작품이고, 발레를 잘 모르는 남자사람이나 어르신들과 함께 발레를 보러가야한다면 주저없이 돈큐를 선택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