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리고 싶은 나의 이름은
나도 그랬다. 딸내미, 아들내미 친구 엄마들과의 모임 안에서 호칭은 누구누구 엄마였다.
그걸 바꾸기 위해 은연중에 노력하기 시작한 건 첫째가 어린이집을 졸업할 무렵이었다.
이미 3년, 4년 정도 누구누구 엄마에 익숙해져 가던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그건 아마 숨 쉬듯, 수저로 밥을 떠먹듯 들리던 나의 이름 석자가 점차 내 아이의 이름으로 대체되어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사춘기 때도 해본 적 없는 나는 누구지 라는 물음을 우물거렸던 그때.
이후로 나는 어색하지 않은 선에서 누구누구 엄마 대신 이름 부르기를 애쓰고 있다.
엄마의 자아 찾기는 육아 경험담이나 자기계발서 등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다.
이름을 찾으세요, 당신은 누구의 엄마이기 이전에 OOO입니다, 진짜 당신은 누구인가요, 예전의 당신은 어땠나요, 꿈을 찾으세요 등등등.
누군가에게는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름.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엄마의 자아 찾기에만 국한되어 있던 이름 찾기가 이젠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있는가 보다.
송길영 대표가 2025년 트렌드를 호명사회라고 명명한 걸 보니 말이다.
송대표의 분석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호명사회에 이르렀는지 아직 디테일하게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략 짐작은 한다.
나 역시 잠시나마 이름을 잊을 뻔한 경험을 했으니.
이름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일제강점기 때 그 놈들이 창씨개명을 시행했을까. 이렇듯 강한 힘을 가졌지만 한번 금이 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바스러지는 게 이름이다. 마치 강화유리 같다.
이름이 부서진 자리에 남겨진 나는 한없이 찔리고 베여서 아프다.
그제야 당연하게 여기던 이름이 얼마나 귀하고 귀했는지 깨닫는다. 그런데 이어 붙이기에는 너무 아프다. 손도 찔리고 피도 난다.
자살을 위해 옥상, 다리 등에 올라간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처음 건네는 말은
"OOO 씨."
라고 한다. 김대리도 아니고 이 과장도 아니고 박알바도 아니고 누구누구 엄마도 아닌, 이름.
당신 자신이 듣고 싶던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내 자아를 인정받았다는 일말의 긍정이 사락 올리오는 것이다.
호명사회.
나를 인정해 줘.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줘.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불러줘. 필요하다고 해줘.
몇 년 전 엄마의 자아 찾기 속에 있을 때는 그것만 안타까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몇 년 전 내 이름을 잃어갈 때 느낀 울컥임이 다시 올라온다.
호명사회라고 명명하고 아젠다를 눈에 보이도록 설정해 줘야만 소중함을 깨닫는 시대.
이 시대와 그 이후까지 살아야 할 우리집 장난꾸러기들을 보니 속이 또 울렁인다.
겉으로 이름이니 뭐니 운운해도 뼛속까지 엄마가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