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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hyunsee Jan 23. 2020

영원한 이방인의 삶

에필로그: 여행의 이유

#01


2013년 12월 24일 3개월간의 동남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시간이 허락하면 홀린 듯 여행가방을 챙겨 떠났다. 20Kg이 훌쩍 넘는 배낭을 메고 목적지 없이 유영하듯 떠돌던 100일 남짓의 배낭여행 동안 여행이 체질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나에게는 다섯 벌 남짓의 여름옷, 세면도구, 여권, 론니 플래닛, 그리고 삼 개월 정도의 생활비,  , 그것이 전부였다.


부족하지만 충만했던 순간들-


이제는 그 누구보다 강건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간 축적된 여행의 추억과 경험들 때문이라고, 눈 감으면 그리고 원하면 언제나 영화보다 더 영화로운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일상의 지치고 힘든 순간 그날의 기억들을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준다.


#02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머리맡에 항상 두고 애정 하던 소녀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그리고 조지 오엘의 <1984>를 마음에 품고 사는 여인이 되기까지


여행은 삶의 구원이었다.


바닷가 마을에서 보름 동안 머물러야 만 했던 적이 있다. 순전히 나의 의지에서 비롯한 시간과 목적지가 아니었다. 잠을 자는 동안 꿈을 꾸지 않는(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보름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과는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해변을 거니는 것, 카페에 앉아 크로와상에 커피를 마시는 것, 그리고 어두운 생각이 나를 잠식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일뿐이었다.


나의 연민과 미움으로 가득했던 그 일기장을 버려야겠다고 다짐한 그날,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03


어떤 신뢰,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집착적으로 주변의 도시들을 여행했다. 그 시간을 통해 그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카프카적 세계관을 서서히 전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예술적으로 성숙한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완벽히 컨템퍼러리 아트에 사로잡혔다. 예술은 더욱 강하게 내 삶이 되었다. 그리고 여행의 이유가 되었다. 저항 정신에서 비롯한 그들의 자유분방함, 시선, 그리고 태도가 좋았다. 인간의 대한 애정이 언제나 작품 내면에 낮게 흐르고 있었다.


돌아보니, 나 혼자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어떤 사건은 언제나 단 하나의 사건 만으로 기인하지 않는다. 여행을 하며 지금까지 배운 삶이란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의 삶도 쉽게 이야기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여행을 기록한다는 것은 애석하게 나의 삶과 생각을 내비쳐야 하는 일이라, 지금까지 말로만 여행 에세이를 쓴다고 퍼블릭하게 이야기하고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2019년 하반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다시 강박처럼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예매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는 떠나는 일(마음속에서는 도망가는 일이라고 말하는) 말고 담아내는 일로 중간 매듭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단편적으로 기억된 이제는 퇴색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 쓰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횟수로는 6년, 가득 찬 5년. 잃어버린 그리고 잊어버린 기억들을 정리하다 보면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겠지, 그래도 이를 통해 어쩌면 더 자유로운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은 믿음이 든다.


삶이 예술 같은 당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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