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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hyunsee Jan 23. 2020

어쩌면, 다 잊어버린 여행의 기록 - 여행경로 | 준비

65일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의 기록 (1)

■ 여행기간 : 2013년 12월 23일 ~ 2014년 2월 26일

■ 여행국가 : 태국 - 라오스 - 캄보디아

■ 여행경로 : <태국> 방콕 - 펫부리 - 카오락 - 푸켓공항 - 치앙마이 - 빠이 - 치앙마이 - 치앙라이 -

                              치앙콩 -

                   <라오스> 후웨싸이 - 빡벵 - 루앙프라방 - 방비엥 - 비엔티엔 - 꽁로동굴 - 타켓 -

                   <태국> 나컨파놈 - 우본랏차타니 -

                   <라오스> 빡세 - 돈콩(Don khong) - 돈콘(Don khon) -

                   <캄보디아> 크라체 - 씨엠립




◼︎ 여행 준비물

- 여권. 여권 사본(5장). 여권용 사진

- 우리은행 EXK 체크카드 2개, 시티은행 비자 체크카드

- 작은 포켓 가방. 복대. 지퍼 팬티 (3장). 방수가방

- 론리 플래닛 2권 - 태국,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태국 북부

- 수건. 속옷(5세트). 수영복. 수면잠옷

- 겉옷: 반팔 4장 (잠옷용 1, 회색 무지 티 2, 흰 티 1), 여행 중 검정 티 1 구입

           짧은 반바지 2, 치마바지 1, 롱치마 1, 긴바지 1, 원피스 2, 난방 1, 후드 집업 1

- 운동화. 슬리퍼. 선글라스

- 생리대. 탐폰. 물티슈

- 디지털카메라. 방수팩. 변압기. 충전기

- 세면도구. 화장품. 화장솜

- 전자모기향(리퀴드). 버츠비 레스큐 오인트먼트. 상비약. 모기퇴치 스프레이

- 빨랫줄. 반짇고리. 손톱깎이

- 수저. 포크



여행, 나도 몰랐던 편견을 마주하는 시간


이렇게 65L 배낭과 보조 가방에 한가득 생필품을 욱여넣고 배낭여행을 시작하였다. 12월 23일 한 겨울의 한국 인천공항에서 에서 태국 수완나품 공황에 도착했던 그날의 공기가 여전히 생경하다. 따뜻하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의 느낌이 감돌았다. 공항에서 방콕 시내로 들어오는 지하철의 사람들은 두꺼운 카디건이나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에어컨은 가동이 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처음 마주한 편견이었다. 나의 기준에서 에어컨은 더운 날에 더위를 식히기 위한 목적을 가진 가전제품이었다. 하지만 겨울에도 다습한 태국에서는 에어컨은 쾌적한 환경을 위한 가전제품이었던 것이다. 처음 태국에 도착했을 때는 쌀쌀한 기온에 에어컨을 트는 태국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금방 나는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에어컨은 여름 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첫날밤, 우리는 카우치 서핑으로 알게 된 조쉬의 집에 머물기로 하였다. 당시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아주 많은 부분을 파트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억 속 조쉬의 집의 위치나 찾아가는 방법은 더욱 희미하다. 조용하지만 방콕의 중산층이 모여사는 스튜디오 레지던스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15-20분 걷거나 역 앞에 기다리던 오토바이 아저씨들을 이용하면 5분 만에 도착하는 그런 곳이었다.


스튜디오 베란다에서는 방콕의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상상했던 동남아시아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게 서울의 여느 동네 모습과 비슷한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여독 때문인지 우리는 파티에 가자던 조쉬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침대 아래 이불을 펴고는 그대로 곯아떨어졌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아침에는 대여섯 명의 카우치서핑 여행자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경계에 존재하는 
목적 없이 따뜻했던 태국에 사는 이방인들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조쉬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실은 K-POP을 좋아한다는 것 그중 빅뱅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게이라는 사실이었다. 도착 후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태국인이 아닌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 고국을 떠나 영어 미술강사로 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쉬는 카우치서핑의 목적을 잘 이해하고 다국적 여행객들에게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내어주는 친구였다. 문제는 집이 10평 남짓의 스튜디오라는 사실이었다. 원래대로 라면 조쉬의 집에서는 최대 2박 3일 정도 머무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를 찾아야 했었다. 허나 일주일 가깝게 그의 작은 스튜디오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쉬의 집에 오래 머물다 보니 조쉬의 측근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태국에 사는 이방인이었다. 조쉬의 애인 데미는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는 동유럽에서 온 친구였다. 조쉬의 태국 생활을 보살펴 주는 애니는 태국 금수저 외동딸이었는데 화려함 뒤에 숨겨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었다. 러브는 필리핀에서 태국으로 간호사 취업 온 친구였다. 그들 모두는 경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애니를 제외하고는 재정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국에 오래 살고 일을 하고 있지만 n개월에 한 번씩 국경의 어딘가를 다녀와야 했다. 모두가 불안을 안고 있지만 서로가 기꺼이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었다.


그 기-인 시간 동안 그 친구들은 단 한 번도 우리와 함께하는 것의 대해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애니와 러브는 퇴근 후 시간을 내어 로컬들의 진짜 방콕을 소개해주었다. 방콕 젊은이들에게 가장 핫한 클럽을 가거나, 로컬들만 아는 저렴하지만 퀄리티 좋은 식당을 데리고 가거나, 큰 마트와 영화관이 있는 멀티플렉스 쇼핑센터, 가족들이나 연인들이 찾는 유원지, 그리고 조쉬의 일터인 유치원까지 진짜 방콕 사람 같은 방콕 생활을 즐길 수 있게 기꺼이 자신들의 시간을 내어주었다. 그들의 친절함에는 그 어떤 목적도 없었다. 부족하지만 함께하고 나눌 수 있기에 외롭지 않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배웠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지금의 당신 마음을 존중합니다.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어준 찌인-한


여행의 시작과 동시에 어떠한 문제로 나와 파트너는 헤어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매일 친구들과 웃으며 파트너와 함께 그 시간을 보냈지만 하루하루가 아픈 날이었다. 모두가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조쉬, 데미, 애니, 러브는 단 한 번도 내가 비추는 근심의 대해 쉽게 위로하는 척하지 않았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의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그들은 내가 슬퍼하는 이유를 내심 아는 것 같았다. 그냥 그들과 나는 이미 진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조쉬, 데미, 애니와는 여전히 서로의 소식을 묻고 이후의 만남을 기약하고는 한다. 지난해 겨울 약 6년 만에 나는 조쉬를 한국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단 한번 만나도 진심으로 나를 대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꺼이 찌인-한 친구가 될 수 있다.



여행의 목적이 ‘내’가 아닌 타인이 되었을 때


12월이지만 한 낮이면 수영을 할 만큼 날씨가 꽤나 따닷했다. 따뜻한 나라의 사람들이 왜 느긋한지 알 것 같았다. 저녁 늦게까지 친구들과 한바탕 놀고 돌아와 오전 11시가 넘어 일어났다. 씻고 점심 먹을 무렵이 되면 날씨는 사람을 늘어뜨렸다. 겨울의 날씨가 그러했으니 여름에는 오죽할까. 방콕의 날 기억해보면 늘어지게 베란다에 앉아 방콕 시내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었지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매번 헤어짐을 다짐하지만 헤어질 수 없는 사연과 사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나의 기분을 풀어준다고 수영장에 내려갔었다. 한국에서도 우리는 줄곧 수영하는 것을 좋아했다. 옛 기억의 우리가 된 것 같아서 인지 아니면 물을 좋아하는 내가 물놀이를 해서인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러다 깨진 타일에 파트너의 엄지발가락이 깊게 베였다.


피가 철철 흘렀다. 그때 호스트인 조쉬와 데미도 집에 있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바이커 아저씨들의 도움으로 근방의 병원을 간신히 찾았다. 크리스마스 연휴로 대로변의 병원들은 문을 닫았다. 60년대 시골 동네 작은 가정의원 같은 곳을 그나마 찾아낸 것이 다행이었다. 지혈을 해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상처 난 부위를 꼬매야 하는데 마취제가 없었다. 마취 없이 찢어진 엄지발가락을 꼬매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많이 아파한 건 다친 당사자가 아니었다. 나는 왜 그렇게 그 상처를 보고 마음이 아팠을까? 애증이란 그런 것이었을까? 헤어져야겠다는 마음이 60%까지 차올랐다가 그 일로 옆에 있어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만 이라도.


솔직해 보자면 헤어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태국이라는 낯선 땅, 더욱이 이것이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의사소통의 거의 불가능했던 영어 실력, 3개월 동안 집도 친구에게 비어주고 나온 상태인지라 돌아갈 곳도 없었다. 그리고 나의 배낭여행의 목적이 그와 함께하기 위한 미래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헤어진다는 것은 내가 맞다고 믿고 결정했던 모든 것들의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었다. 목적의 주체가 내가 아닌 타인이 된 그 순간부터 그가 흔들리자 내 인생 전체가 흔들렸다.


인생은 옴니버스 같은 것,
중첩된 즐거움과 어려움 사이에서 나만의 균형을 갖고 살아 내다 보면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가장 아이러니한 시간을 지내온 시간이었다. 12월의 방콕의 날씨는 요상 했다. 겨울의 쌀랑함은 있지만 에어컨을 틀었고 햇볕은 느슨했다. 함께하고 싶지만 헤어지고 싶었고, 가장 마음이 아픈 날들과 가장 선의의 도움, 낯선 이들로부터 그간 느끼지 못했던 인간미를 느꼈다.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았지만 낯선 이방인들과 진짜의 삶을 보냈다. 좋은 날과 어두운 날은 순차적으로 줄을 지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중첩되어 있었다.


오늘의 나는 목적 없이 누군가에게 의존적으로 지내온 그날들의 나를 마냥 어리석었다고 탓할 수 없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라고 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비극과 희극의 날이 교차되던 그날들 동안 세상의 그 누구보다 가장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나 질문을 해 본다면 여전히 그 꽃을 피우기 위해 흔들리고 있노라고.


그래도 이젠 온전히 한 사람에게 내 인생을 베팅하는 그런 바보 같은 게임은 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가 갖은 옳음의 대한 합리적 의심을 해보는 버릇도 생겼다. 내 세상에 존재하는 일반화된 것들보다는 그 경계 어딘가에서 따뜻하게 사는 사람들을 존중한다. 아주 뚜렷한 목적보다는 유연한 그러나 나만의 고집스러운 'WHY'를 마음속으로 품고 살아간다. 사람 향 폴폴 나는 타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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