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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 Dec 26. 2020

엄마 안녕 #001 : 프롤로그

장례식장에서, 나 울지않았어.



2012년 2월. 외할머니 장례식에서였다. 누군가가 와서 세상 떠나가게 곡을 하고 뚝 그치고 밥을 걸판지게 먹었다. 누군가 했더니 명절마다 꽤나 외갓집 와서 시끄럽게 험담하고 웃고 떠들고 울며 할머니가 만들어놓은 음식을 축내던 이다. 장례식장에서도 여전하다.

상복을 입은 엄마가 그이를 바라보며 나를 불렀다. 이리로 와보라고. 내가 가서 옆에 앉자,

원래 생전에 그 사람한테 최고로 잘못한 사람이 제일 많이 우는 거야. 봐 외할머니 영정사진 화났지.

라고 하고서는 그이에게 눈길도 안 줬다. 엄마는 그분을 정말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8년 뒤. 엄마는 갑자기 떠났다.
나는 엄마를 보내는 날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또 만나. 잘 지내. 또봐

라고 허세를 잔뜩 부리며 담담하게 말하고 장례식장에서도 괜찮냐고 묻는 이들 앞에서 괜찮다고 했다. 내가 엄마한테 제일 못한 것처럼 비치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장례식장에서는 아빠가 가장 많이 울었다. 가장 서럽게 울고 또 누군가 앞에서는 웃고 또 누군가의 앞에서는 괜찮은척하다가 또 빈소 앞에서 울었다. 아빠는 배우자니까 열외로 한다.

엄마가 생전에 그 말을 나한테만 한 건 아니었는지 장례식장에서 뒤집어지고 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만큼은. 나는 주로 남편과 빈소를 지켰다. 대부분 엄마의 사진을 지켜봤다가 아빠와 동생들의 동료들이 오면 같이 절을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괜찮았냐고? 절대 안 괜찮았을 텐데 괜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정사진 앞에서 울기 싫었다. 입관식 때도 안 울었다. 장례지도사가 별의별 멘트로 아빠를 울릴 때에도 나는 안 울었다. 또 만나자는 허세성 멘트를 뻐꾸기처럼 날렸다.

사실 내가 정 줄 놓고 뒤집어질 순간이 잠시 있었다. 큰 이모와의 이야기는 따로 써도 모자랄 에피소드가 많은데 하여간 내가 이제 내 지인은 다 왔는가 보다 싶어서 잠시 빈소 구석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큰 이모가 휴게실 문을 빼꼼 열고 나를 부르는 거다.

너는 왜 이렇게 부었니? 살쪘니? 피곤하면 들어와서 자. 늬 엄마가 이런 거 보면 속상하겄다.

라고 하는 거다. 평소 같았으면

살찐 거야. 안자.

이모는 한 번 더 권했다.

안 잔다고.

내가 진상을 부리면서 빈소 한가운데에 드러누우려던 찰나,

아이고 나모야.

하면서 주온 부부가 찾아온 거다.(주온: 스무 살의 자취방 편 참고) 엄마는 끝까지 내가 진상 부릴 것을 허용하지 않은 거다. 나는 급하게 옷매무새를 만지고 주온 부부와 인사를 나눴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직도 주온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게 1박 2일 같은 2박 3일을 보냈다. 새벽에 화장터로 향했다. 눈을 뜨는 건지 감은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화장터 관망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많은 친인척이 있었지만 그냥 나는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관이 화장터로 들어가는 순간에

울기 시작했다. 남편은 말없이 계속 토닥였고 사람들은 민망했는지 관망실을 떠났다. 화장이 진행되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 중 삼십 분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다른 이들이라고 왜 안 울고 싶었겠느냐만은 그런 상황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냥 울었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했다. 나는 엄마 힘들게 한 딸도 아니고 주야장천 고생과 걱정만 시킨 딸이 아니라는 것을 왠지 증명하고 싶었는데 끝내 나는 그냥 울어버린 거다. 그래도 엄마.

엄마. 나 이때만 울었다. 진짜로 화장터에서만 울었다.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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