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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Jul 22. 2021

옷 사지 않는 삶

쇼핑 욕구 극복 일지 :1일 차

각오는 핑계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제주로 떠나기 전에 다짐했었다. '이번에는 꼭 결과물을 들고 오리라.' 여기서 결과물이란 커리어에 유의미한 글을 말한다. 가령 도전해보려 했지만 결국 미뤄두기만 했던 잘 짜인 드라마 시놉시스나 단숨에 내 위치를 격상시켜줄 수도 있는 짧은 소설 같은. 그도 아니라면 너무 재미있어서 안 읽고는 못 배길 에세이의 초안을 만들어 올 생각이었다.  세 권의 에세이를 낸 에세이스트이지만 여전히 대필과 인터뷰 등의 삯 글로 벌이를 하고 그마저도 일거리가 점점 사라져 가는 미래의 불안을 잠재워줄 그런 결과물을 말이다. 


이 구구절절에서 이미 느꼈겠지만 보름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시놉시스도 소설도 에세이도 없다. 제주는 아름다웠고 한라산 17은 부드러웠으며 함께 동행한 강아지 두 마리는 나를 끊임없이 걷게 했다. 애견 동반이라 이름 붙은 카페나 식당은 '가방 안에 들어가 얌전히 있는' 애견 동반이었으므로 어디도 들어가지 못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차를 몰다 걷다 차를 몰았다. 남쪽에서 비가 오면 날이 맑은 서쪽으로, 서쪽에 비가 오면 땅이 보송한 동쪽으로 매일 해를 쫓다 지쳐 돌아와 소주를 마셨다. "한라산 17도 너무 좋아"를 반복하다 잠이 들고 다시 일어나 하루를 반복했다. 제주에 있는 내내 낮에는 빛에 밤에는 술에 절어 지내느라 결국 어떤 결과물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반복과 반복을 반복하는 게 각오이고 다짐이고 인생이다. 비록 제주에 가기 전 다졌던 각오는 여름 밤바다 별빛 아래서 마시는 술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각오가 돋아났다. 


불콰해진 어느 밤이었다. 여행지에서의 밤은 언제나 일상의 밤보다 길거나 짧았는데 그날은 유난히 길고 길었다. 배우 남주혁의 표현처럼 공기도 습도도 조명도 낯선 방에 누워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나라는 인간은 왜 이곳까지 와서 한 줄도 쓰지 못하는가, 애초에 나라는 인간은 왜 쓰는 일을 업으로 택했는가를 따져 묻다 각성이 되는 바람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결국 자연스러운 수순. 책을 펼쳐 읽었다...면 그런 고민 따윈 처음부터 하지 않았겠지. 나란 인간은 그렇게 성실하게 세팅되지 않은 인간이라 충전해 놓은 스마트폰을 깨워 유튜브를 켰다. 켜고, 다큐멘터리를 찾았다. 영상이나 보며 시간을 허비한다는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는 콘텐츠였다. 옷과 관련된 환경 다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게 기억나 일부러 검색을 해 영상을 틀었다. 환경과 옷, 둘 다 나의 관심 카테고리 안에 있는 키워드였다. 


옷으로 만든 산과 강이 펼쳐졌다. 산처럼 쌓여 있는 옷의 무덤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 <페르손>을 거대 사이즈로 옮겨 놓은 듯했다. 안타깝게도 헌 옷을 통해 인간의 덧없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볼탕스키의 예술적 의도와 전혀 다른 경로로 모여 있는 그 산과 강에 나는 압도됐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 속이었지만 그게 얼마나 크게 느껴졌는지 마치 아이맥스 영화관 스크린으로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은 한때 누군가의 이미지였던 껍데기도 무엇도 아닌 그저 구역질 나는 인간 욕망의 배설물이었다. 매년 생산되는 옷 1000억 개, 버려지는 옷 330억 개. 오염되고 말라버린 강과 쓰레기만 남은 척박한 땅 위에서 배고픈 소들은 풀이 아닌 옷을 먹고 있었다.

1000억 개의 옷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값싸게 노동을 팔았고 누군가는 그 옷을 쉽게 사고 쉽게 버렸다. 나는 후자였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이 모든 것들이 감쪽같이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버려지는 옷은 4000톤. 이 중 15%는 쓰레기로 5%는 구제시장으로 가고 나머지 80%는 수출을 통해 나라 밖으로 버려졌다. 옷무덤이, 옷으로 만든 강이 우리 동네에 있었다면 나는 그렇게 쉽게 옷을 사고 버리지 못했으리라. 


상념을 잊기 위해 틀어 놓은 영상으로 상념이 추가되었던 그날 밤 나는 제법 진지해졌고 마침내 결심했다. 


더 이상 옷을 사지 않으리. 

내 욕망의 찌꺼기로 다른 이들의 삶을 더럽히지 않으리. 


빛과 술에 적당히 절여진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이번 여행에서 단 한 벌도 옷을 사지 않은 나 자신을 칭찬하며  김포공항 수화물 벨트 위에서 트렁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앞으로 옷 사지 않는 삶에 대한 기록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며 멀쩡한 옷을 잔뜩 버렸던 몇 년 전의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때 난 옷을 사고 싶다는 욕망과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는 대외적 선언에 대한 책임 사이를 오가며 괴로워했다. 결국 내 돈 내 산이 아니면 괜찮다는 궤변으로 동생들과 남편의 삥을 뜯어 기어이 옷을 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에게 민폐를 끼치느니 그냥 다시 내가 옷을 사겠다고 전격 발표했고 가족들은 안도했었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공식적인 공간에 매일매일을 기록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잠깐 확인한 인스타그램 속 인플루언서의 크림빛이 도는 화이트 리넨 원피스가 너무 예뻐서 DM으로 정보를 물어볼 뻔했다. 유혹이 계속되는 매 순간 이 기록이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기를 바랄 뿐이다. 


결과물을 손에 쥐진 않았지만 다행히 새로운 각오가 생겼다. 커리어에 의미가 있건 없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시작이라는 것에 조금 설렌다. 









: 메인 이미지는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작품 <Personnes>이다. <세계 100대 자굼으로 만나는 현대미술강의> 52page를 찍어 올렸다. 질문하는 삶을 살았던 예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지난 7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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