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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Jul 23. 2021

옷 사지 않는 삶

쇼핑 욕구 극복 일지 : 2일 차

옷을 사지 않겠다는 각오를 올린 지 24시간 아니 24분이 채 되지 않아 나는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사려 했던 아이템이 있었다. 그걸 사고 브런치를 시작하려고 했었다. 내일부터 다이어트와 같은 의미랄까. 개운하게 먹고 아니 사고 짠 시작 하려 했건만 웬일로 잊고 말았다. 나는 하나 남은 총알을 쏴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병사처럼 한동안 망연했다. 크으, 마지막으로 그것만 사고 프로젝트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속이 상해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는 이 없다 해도 양아치처럼 게시글을 삭제했다 다시 올릴 수는 없는 일. 저녁 반주로 소주 석 잔을 마시고 깨끗하(다고 믿고 싶지만 여전히 찜찜하)게 포기했다. 


옷 사지 않는 삶을 살기 전 마지막으로 사고 싶었던 아이템은 '라펠'이었다. 전문용어를 찾아보니 '코트나 재킷의 앞 몸판이 깃과 하나로 이어져 접어 젖혀진 부분'이라고 나와 있다. 흔히 카라라고 부르는 부분인데 페이크 카라라고 알려진 그 모양이다. 예전 가짜 목폴라처럼 생긴 가짜 셔츠 칼라. 

제주 여행 때 유기동물 돕기 플리마켓에서 산 강아지 옷이 너무 고급스러워 브랜드를 찾아보니 고급 원단으로 수작업을 하는 아틀리에였다. 독특하고 고급스러운 원단에 잘 재단된 로브, 셔츠, 스커트, 바지 등이 있고 같은 원단으로 만든 반려동물의 옷이 함께 전시돼 있었다. 요즘은 특이한 프린트나 컬러의 실크 등으로 '라펠'을 주로 만들고 있었다.


여행을 좋아해서 무게감이 없고 휴대하기 좋은 포인트가 될 소품 같은 보조 의류들이 보이면 챙겨 사는 편이었다. 캐시미어 소재의 페이크 후드는 하루에 사계절을 만나는 변화무쌍한 여행지를 찾을 때는 물론 가을 겨울 두루두루  정말 잘 쓰고 있다. 흰색과 검은색 기본 니트에 그런 보조 의류들만 잘 챙겨가도 매일 기분 전환이 된다. 이런 경험 때문에 아틀리에의 라펠을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고, 당장 여러 개를 구입하고 싶었다. 아니 SNS에 올라온 아틀리에의 꾸민 듯 안 꾸민 듯 편안하고 세련돼 보이는 박스형이지만 전혀 부 해 보이지 않게 패턴을 잡은 리넨 셔츠도 사고 싶었다. 아니 세상에 없는 고급스러운 붉은색이지만 절대 무거 워보이지 않는 로브를 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유혹을 하나씩 차곡차곡 접어 놓고 가장 독특하고 질리지 않는 프린트의 실크 라펠  딱 한 개만 사야지 마음먹었다. 그 아틀리에의 라펠을 알기 이틀 전 하필(?) 환경스페셜 다큐멘터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라펠을 보면서 어떤 걸 살까, 며칠간 즐거운 고민을 했다. 그래 이것만 사고 옷을 사지 않는 거야. 마지막이야. 이 정도로 꽂힌 아이템이라면 고민 없이 서너 개를 한꺼번에 질렀겠지만 옷의 산과 강을 떠올리며 기꺼이 참았다. 참고 참으며 마지막으로 딱 한 개만 사야지 했는데 집에 돌아와 짐 정리를 하고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여독을 푸느라 완전히 라펠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이다. 


이런 날이 온다. 뭔가를 사겠다는 걸 잊는 날이. 사고 싶다는 욕구가 사라진 자리에 지키고 싶다는 더 큰 욕구가 들어왔다는 신호일까? 라펠을 살 기회를 놓쳤다는 절망이 옷을 사지 않는 프로젝트를 제법 잘 해낼 수도 있겠다는 희망으로 다가온다. 좀 전에 SNS로 블랙핑크 제니의 사진이 올라왔다. 인디언처럼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핑크색 스웻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상큼한 모습이다. 태닝 한 피부에 무척 잘 어울린다. 강아지들과 아침저녁 땡볕에도 산책을 하는 나의 피부색과 꼭 같다. 제니랑 얼굴도 몸매도 다르지만 태닝 한 피부색이 같으니 저 핑크 스웻셔츠 세트를 입어보고 싶다. 스웻셔츠가 여러 벌 있지만 제니의 핑크색은 없다. 스웻셔츠는 원단의 무게에 따라 질감이 달라지는데 제니의 것과 같은 질감의 스웻셔츠도 없다. 하지만 오늘도 사지 않는다. 제니 스웻셔츠, 를 검색하지 않는다. 아마 이 또한 금방 잊히겠지. 


영혼보다 몸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더 쉽고, 사회적으로 승인된 욕망의 제단에서 예배하는 것이 모든 열정의 표현과 모든 욕구의 만족까지 고려해 자신만의 제단을 건설하는 것보다 쉽다고 작가 캐롤라인 냅은 말했다. 쇼핑을 하는 게 쓰레기더미를 멈춰보겠다는 도전보다 훨씬 쉽고 그래서 더 강력하지만 때론 너무 쉬워 잊혀지기도 하므로. 어쩌면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도 있겠다는 희미한 희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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