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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영 Jul 24. 2021

옷 사지 않는 삶

쇼핑 욕구 극복 일지 : 3일 차

39도, 뜨거운 날이다.

토요일엔 남편이 야구를 하러 가고, 여름의 토요일엔 돌아오는 고속도로의 정체로 도착 시간이 늦어지기 때문에 책방 문을 내가 연다.

책방에 나갈 땐 직장에 간다는 생각으로 옷을 신경 써서 입는다. 시골에 작은 책방이 신기해서 들어왔는데 추레한 아줌마가 앉아 있으면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왕이면 산뜻하게 누구라도 다시 오고 싶게, 주인의 스타일은 공간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갈 때마다 나름의 고민을 하며 복장을 갖춰 입지만 안타깝게 손님이 한 명도 들어오지 않는 날도 있다. (이 문장을 쓰면서 잠깐 울었다.) 그래도 시골마을에서의 별일 없는 일상에 잠깐의 꾸밈 시간이 활력이 된다. 대단하게 치장하는 건 아니다. 안 하던 볼터치를 세게 두드리고 그날 입을 옷에 맞춰 안경을 골라 쓰고 안경에 맞춰 액세서리를 정하는 것. 딱 그 정도다. 


오늘은 너무 더워서 뭘 입을까 고민을 했다. 평소의 나는 남들이 보기에 과감한 편이다.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몸매여서는 절대 아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국민들이 평균 4kg이 쪘다던데 쓸데없이 그 평균을 맞춰 과체중에 접어들었다. 이런 내가 노출이 있는 옷(이래봤자 민소매 티셔츠, 원피스 등등)을 아무렇지 않게 입는 건, 생각보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 봐, 사람들이 별로라고 할까 봐, 남들 눈에 예뻐 보이지 않을까 봐 입고 싶은 옷을 못 입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신경 쓰느라 너를 볼 여력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었다. 대신 딸아이에게 자주 말해줬다. 이제는 중년의 몸매를 고민하는 나에게 역으로 딸아이가 조언을 한다. "엄마, 사람들은 엄마한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라고. 


맥시멀 리스트에게는 수영복도 여러 벌인데 대부분이 비키니다. 비키니가 모래사장에 누워 책 읽으며 태닝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기 편하기 때문이다. 젖은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화장실에 가 보지 않았다면 말을 말자. 물을 먹어 늘어진 채 돌돌돌 말려 내려간 걸 다시 펴서 겨우 팔을 낄 때의 그 뻑뻑함. 해수욕장 공중 화장실에서 들리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다급한 노크 소리.  비키니는 그럴 걱정이 없다. 물론 비키니 입고 예쁘면 좋겠지. 하지만 비키니를 입고 예쁘려면 선천적으로 말랐거나, 살이 절대 안 찌는 체질이거나, 타고난 습성을 거스르고 덜 먹는 인생을 살거나, 운동을 선수처럼 해야 한다. 나는 넷 다 안되기 때문에 비키니를 입고 예쁘지 않지만 입는다. 왜? 편하니까. 남들이 그다지 나를 열심히 바라볼 것이 아니므로.


39도, 오늘은 정말 비키니라도 입고 나가야 하는 날씨지만 책방과 비키니는 안 어울리니까 패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을까 했는데 폴리 소재가 더 더울 것 같아 패스. 짧은 민소매 면 원피스는 너무 가벼워 보여서 넘기고, 긴 민소매 면 원피스는 어쩐지 잠옷 같잖아. 만만하게 흰색 민소매에 검정 반바지를 입자니 괜히 마음이 안 가는데 어머나! 이게 뭐지? 


옷걸이에 얌전히 걸려 있는 사락사락 소리가 날 것 같은 시원한 면 혼방 여름 원단의 롱 원피스를 발견했다. 택도 떼지 않은 것이었다. 핑크에 그레이를 한 방울 섞은 컬러의 그 원피스를 샀던 날이 떠올랐다. 봄이었고 날이 좋았고 바람이 좀 불었는데 원고를 쓰다가 막혀서 인터넷 쇼핑 사이트에 들어갔다. 이게 어떤 의식의 흐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주 그래 왔고 그날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원고를 쓴다, 안 써진다, 화가 난다, 쇼핑 사이트에 들어간다의 순서였다. 그렇다고 매번 구매하기 버튼을 누르진 않는다는 게 변수라면 변수일까. 그냥 뭐 괜찮은 게 없나 둘러보기만 하고 나오는 날이 더 많았는데 그날은 세상에, 디자이너 브랜드의 원피스를 80% 할인해 팔고 있었다. 그때도 나름 나의 소비패턴을 반성하며 세일할 때마다 너무 사들이다가 진짜 갖고 싶은 게 있을 때 못 사게 될 수 있으니 자제하자, 라는 생각을 했고 그 원피스 딱 하나만 주문을 했다. 


이틀 후 원피스가 도착했고 그걸 입어보자 마자 나는 황급히 그 사이트에 다시 들어갔다. 같은 디자인의 흰색과 하늘색을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80% 세일에 긴가민가 하나만 주문했는데 발목에서 종아리 알 바로 직전까지만 보여주는 현명한 길이에, 옷감을 아끼지 않은 넉넉한 폭은  배 안에 수박 한 덩어리를 숨겨도 감쪽같이 모를 정도의 낭창한 실루엣이었다. 게다가 삶의 질을 높여줄 딱 알맞은 위치에 자리한 주머니와 셔츠 스타일의 단정한 디자인. 48색 크레용 컬러로 다 만들어도 전부 사도 될 궁극의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들어간 사이트에 원피스는 예상대로 품절이었다. 소비 패턴이니 어쩌니 잘난 척하던 이틀 전의 내가 정말 꼴 보기 싫고, 그 완벽한 원피스의 흰색과 하늘색이 없이 여름을 나야 하는 나 자신이 안쓰러운 양가감정에 휩싸인 채 며칠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 그렇게 깔 별로 사지 못한 미련한 나 자신을 괴롭혔던 그 원피스를 지금 여름이 시작된 지 어언 두 달 여. 기온이 펄펄 끓어 39도까지 올라가도록 택도 떼지 않고 단 한 번도 입지 않고 있었다. 흰색과 하늘색을 사지 못해 나는 이제 망했네, 올여름 입을 옷이 하나도 없는데 큰일이 났네, 세상이 무너졌던 바람 불던 어느 봄날의 나에게 나는 묻고 싶었다. 왜 그런 거니?


옷을 사면서 항상 이런 감정에 휘둘렸었다. 그 옷을 내가 꼭 입어야만 할 것 같은, 입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없으면 나에게 아주 불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어쩐지 손해를 볼 것 같은 그런 느낌. 오늘 몇 달 전 사고 방치해 둔 새 원피스의 택을 떼고 입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얼마나 가짜 감정에 속았던 거야, 옷 사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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