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도씨 Feb 03. 2022

입사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나의 가능성을 믿고 살아가기를 택했다.


비상. 비상.

약물 치료를 끝낸 지 3달 만에 또 한 번 감정의 해일이 거세게 몰아쳐왔다.

그간 나를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 줬던 믿음이 휩쓸려가 버렸다. 그렇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어쩌다 이렇게 또 깊고 어두운 밑바닥까지 가라앉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무력하게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면 조난은 아니지 않을까? 다시 또 아무렇지 않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까?' 이런 기약 없는 희망을 바라면서 말이다.


최근 나의 감정에 영향은 준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게도 나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중년의 남성들이었다.

한 명은 사업을 같이 만들어갔었던 대표, 나머지는 구직 중에 티타임을 함께한 어느 스타트업의 임원이었다.


"혹시 본인이 좋은 대학을 나와서 남들보다 한 마디 더 얹어야겠다는 강박이 있나? 내가 보기엔 그렇게 보이는데?"

"본인은 천재가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세상을 이끄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본인은 좀 힘들 것 같아."

"오 정말 말도 잘 못하시고 지식도 별로 없으시네요."

"눈을 보니까 고집이 가득한 눈이네. 에고도 강하신 것 같고."

"저는 본인 같은 사람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 이 사람에게 학교 이름 빼고 남는 게 뭘까?'"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들이지만 나는 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정말 잘 살아온 걸까?', '나는 쓸모가 있는 사람일까?' 나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 멀리했었던 질문들을 다시 한번 꺼내 부검하며 반박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으려 애를 썼다. '굉장히 불쾌한 이야기네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뜰 수도 있었음에도 나는 버텼다. 도리어 상대의 비위를 상하지 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쏟았다. 기회가 이것만 있는 게 아닌데도 나는 마치 이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인 것처럼 어떻게든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아득바득 매달렸다.


구직자의 삶을 택하면서 여유로웠던 마음가짐이 다시 흐트러지게 된 것 같다. 새로운 회사를 찾기까지 나는 약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수년 동안의 축적되었던 나의 삶을 잘 팔리게끔 이야기해야 하며, A4 한 두장에 '저는 이렇게 알차고 생산적이게 살아왔습니다.'를 증빙해야 한다. 아주 일목요연하고 임팩트 있게.

저의 가치를 인정하시나요? 그렇다면 저를 채용하세요! 구직자의 삶을 겪어보았음에도 이 과정들이 괴롭기만 하다. 흘러가는 시간과 빠져나가는 통장 잔고가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든 데에 한몫을 하고 있다.


엄마 말이 떠올랐다. "차근차근 나아가면 모든 게 해결된다"
차근차근 풀어보았지만 결국 100점은 못 받았지만 기분이 좋았다.


20년 전 나는 시험에서 100점을 못 받아도 행복해했다. 90점, 100점 맞는 것보다 포기하지 않고 차근차근 해낸 자신의 모습이 더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차근차근 천천히 생각하며 나아가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중요한 걸 왜 모른 체하려 했을까. 불안은 나의 시야를 계속해서 가린다. 좋은 것을 보려 할 때 교묘하게 눈을 가려서 나쁜 것들만 보이게 만든다. 마치 나의 앞길에는 좋지 못한 것들만 가득한 것처럼 말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그 회사는 면접 이후 나에게 오퍼 레터를 보냈다. 내가 나를 주저 없이 괴롭히면서 그토록 원했던 결과였지만 나는 고민 끝에 거절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곳에서 일하게 된다면 당장에 돈을 벌 수 있겠지만 나를 지키면서 살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일은 서두르면 그르치는 법이다.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차근차근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나에게 더 믿음을 가져보려 한다. 몰아치는 불안의 파도 위에 올라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나의 모습을 기대해주시기를.

작가의 이전글 선생님, 저 잘 살고 있는 거겠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