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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eam Apr 09. 2024

아이와 함께

이렇게 살아도 되네 10편

    

 조용한 시골집에서 아이는 우리의 친구였다. 순간순간 변화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이의 모습을 놓칠 새라 우리는 함께 산책하고 함께 뒹굴며 놀았다.


 아이를 키우는데 돈은 별로 들지 않았다. 천기저귀가 아이에게 더 좋다고 해서 열심히 기저귀 빨래를 하며 시댁이나 친정에 갈 때도 한 보따리씩 천기저귀를 싸들고 다녔다. 

 아이가 태어난 지 1년이 다되어 갈 때, 나는 입을 벌릴 수 없을 정도로 잇몸병이 심하게 났다. 항생제를 먹어야 하고 보름 정도 수유를 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참에 모유 수유를 중단하기로 했다. 

 “엄마, 맘마” 

 울면서 젖을 파고들던 아이에게 그때 한창 나기 시작한 무른 복숭아를 입에 물려주니 아이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복숭아를 빨다가 잠이 들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여하튼 아이의 분유 값은 거의 들지 않았다.    

 

 환경호르몬이 나온다는 알록달록 플라스틱 장난감은 아예 사주지 않았다.  

 그때 도시에 사는 친구들은 새댁 살림에 큰맘 먹고 70만 원씩 하는 ‘은물’이라는 나무 장난감을 사주었다고 얘기했다. 아이의 창의력을 높여준다고.

 ‘70만 원?!’ 나는 속으로만 입을 딱 벌렸다. 당시 우리의 한 달 생활비 보다 많은 돈이었다. 나도 아이에게 플라스틱 장난감 대신에 은물을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는 우리에겐 턱도 없는 일. 나는 조금 기가 죽었지만 남편이 작업할 때 나온 원목 자투리들을 사포로 곱게 다듬어서 쌓기 놀잇감으로 주었다. 주방 싱크대 아래 칸에 넣어둔 살림도구들도 마음껏 어지를 수 있는 장난감이 되었고, 종이와 그림도구도 아이의 장난감이었다. 


 아이는 앉을 수 있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생후 6개월 정도였나. 아이가 30분가량이나 꼼짝 않고 앉아 종이에다 형체 모를 선을 계속 그리고 있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6개월 된 아기가 그 정도로 집중할 수 있는 건가?     

 누구도 태어날 때 조건을 선택할 수 없다. 우리도 그랬고 우리 아이도 그랬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할 재료가 늘 손 닿는 곳에 있었고, 아빠가 그림 그리고 뭔가를 뚝딱뚝딱 만드는 것을 자주 보았다. 나는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주었고 책을 읽어 주었고 피아노를 쳐주었다. 우리 둘 다 음악을 좋아해서 함께 피아노 치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옆에서 아이도 같이 8월의 크리스마스, 조율 같은 노래를 목청 높여 몸을 흔들며 우리와 함께  불렀다.      

 사실 아이의 이름은 조율, 아빠 성에 외자 ‘율’을 붙인 이름이다. 음률 율, 법률 율의 그 율. 처음엔 뜻이 예뻐서 ‘물 흐를 율’을 쓰려고 했는데, 한학자이신 사촌오빠가 ‘골몰할 골’ 자로 더 많이 쓰인다고 알려주셔서 깜짝 놀라 대체한 글자다. 한 영애의 조율은 우리가 정한 딸의 주제가이다. 

 아이가 세 살 때, 대구 가는 길에 한 시간가량 달려가는 차 안에서 아이가 지루해서 보챌까 봐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때 불러준 노래가 한 영애의 조율이다. 아이는 계속 또 불러달라고 졸랐다. 우리는 한 서른 번이나 불러야 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 담다는 하느님이여 조율 한 번 해주떼요......”

 하며 혼자서 부르는 게 아닌가. 자기 주제가인줄 아는 건지? 하하.

 우리의 소질과 특성들은 생활 속에서 아이의 소질과 특성이 되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면소재지에 있는 어린이집에 보냈다. 다른 아이들은 오후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있었지만 그건 어린아이에게 너무 지루하고 힘들 거 같아 나는 두 시경이면 집에 데리고 왔다.

 아빠는 초상화 일로 멀리 외지에 나가는 일이 잦아 아직 운전을 하지 않던 나는 거의 일 년 동안 자전거에 아이를 태워 어린이집을 오갔다. 그때는 어린이집에서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않았다. 자전거 앞쪽에 작은 의자를 달고 아이를 앉혀 안듯이 양손으로 자전거 손잡이를 잡았다. 비바람 치던 날에도 아이를 폭 덮어주고 나는 비옷과 모자를 쓰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어린이집 가는 길 개울가에는 그즈음 청도군에서 많이 심던 루드베키아가 길 따라 피어있었다. 개망초 흰 꽃이랑 노란 루드베키아가 바람에 흔들리는 위로 꼬리가 길고 빨간 점이 나 있는 아이보리색 나비들이 오르락내리락 날아다녔다. 품 안에 아이를 감싸고 나비가 몇 마리 있을까 같이 헤아리며 아침 공기 속을 달려간 그때는 정말 다시 못 올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어떨 때는 돌아오는 길에 개울가 비탈진 곳에 큼지막하게 윤기 나는 오디가 주렁주렁 익은 걸 보고 둘이 손과 입이 까매지도록 따먹기도 했다. 어찌나 달았던지.  

   

 어린 시절 아이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에 빠져서 보냈다. 어떨 때는 너무 폭 빠져서 만들기를 하고 있길래 시계를 보았더니 무려 네 시간 동안 한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있는 거였다. 

 “ 하이고, 괜찮나?” 

 하니 그제야 고개를 들고 뒤로 드러누우며

 “ 힘들어.......” 한다.      

 아이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음악에 빠졌다. 중학교 때, 모아둔 용돈으로 아이팟을 사서 자기 취향을 따라 여러 음악을 즐겨 들었다. 이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집에 오는 주말마다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기숙사 생활과 대입 시험공부의 힘겨움을 달랬다.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좋아하던 아이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관련 분야에서 일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맛있는 걸 먹을 때나 재밌는 영화를 볼 때나 가까운 곳을 여행할 때 우리의 단짝 친구였던 아이가 꼭 생각난다. 

 “율이도 있었으면 좋을걸......”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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