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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ckie May 28. 2021

책으로 이음

이번 주 독서 모임 선정 도서인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를 사러 집 앞 중고 서점에 갔다. 시집을 읽고 제일 마음에 드는 시를 하나 골라 발표하는 온라인 시낭송회를 열기로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내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관찰하며 책을 읽었다. 읽는 내내 마음에 드는 시가 너무 많아 고를 수가 없었다. 중간쯤 읽었을 때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실린 페이지의 모서리가 접혀 있는 걸 발견했다. 이 책의 전 주인은 이 시를 기억할 필요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특히 마음에 들었거나. 익히 알고 있던 시였음에도 누군가가 접어놓은 모서리 탓인지 시가 더 특별해 보였다. 제일 마음에 드는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수영의 시를 발표하고 싶어졌다. 시를 두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이 시를 낭송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국민학교 시절, 새 학기를 준비하는 2월이 되면 등교를 준비하는 나를 대신해 부모님이 치르는 의식이 있었다. 2월의 주말 저녁, 아버지는 새 학기 교과서를 모두 꺼내오라고 했다. 새 교과서와 작년의 달력 종이, 그리고 가위가 준비되면 교과서를 차례로 쌌다. 교과서 종이보다 더 두껍고 튼튼한 달력 종이를 뒤집어 하얀 면이 보이면 교과서를 조심스레 감쌌다. 교과서 크기에 딱 맞게 달력 종이에 자국을 내고 남은 부분은 책 안쪽으로 책날개처럼 접어 넣는다. 그러면 종이는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던 교과서의 겉표지인 양 남는 부분 하나 없이 교과서에 꼭 들어맞는다. 책 머리챙의 위 아래 남는 부분은 잘라서 달력 종이 안쪽으로 보이지 않게 정리한다. 풀리지 않게 표지의 모서리까지 접어 넣으면 교과서는 새 학기 준비를 마쳤다. 아직 주인의 손길을 한번도 타지 않은 새 교과서는 험난한 공부 여정을 위해 새하얀 갑옷이라도 두른 듯 비장해 보였다. 



여자 손처럼 작고 말라 군살 박힌 아버지의 손은 천천히 종이를 접었다. 아버지의 손이 꼼꼼하고 야무지게 교과서를 하나하나 싸고 있을 때면 아버지의 손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혹시 내가 보내는 눈길이 아버지의 섬세한 작업을 방해할까 싶어 조용하게 아버지의 작업을 바라봤다. 하나라도 놓칠까 봐 집중했다. 어른의 손길은 빈틈이 없는 거구나. 아버지의 손놀림에 감탄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완성품처럼 보이는 책싸기가 가능하겠거니 기대했다. 



교과서가 온통 흰 바탕으로 바뀌면 아버지는 붓펜으로 각 교과서의 과목명을 써주셨다. 아버지에게만 보이는 투명한 점선이라도 있는 건지 글씨는 내려가지도 않고 올라가지도 않고 균형을 맞춰가며 흘러가듯 써졌다. 교과서 뒤 내 이름도 궁서체로 써주셨다. 내 이름만큼은 직접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내 글씨보다는 아버지 글씨가 더 마음에 들어 나서지 않았다. 



아버지가 싸주신 교과서의 달력 겉표지는 한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어도 여전히 건재했다. 표지에는 낙서가 생기고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얼룩이 묻고 아버지가 써주신 이름은 흐릿해졌지만 여전히 교과서는 안전했다. 페이지 끝은 조금 너덜해졌지만 여전히 공부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깨끗한 책이었다. 새 학기 교과서를 준비하는 일은 장사로 바빠 우리와 보내는 시간이 늘 부족했던, 무뚝뚝하고 말수 적은 아버지가 보여준 가장 고상한 시간 중 하나였다.



새 학기를 준비하는 엄마의 의식은 참고서 구매였다. 국민학생인 나에게 엄마가 사주는 참고서는 동아 전과와 표준 전과였다. 나는 읽기 편하고 익숙한 동아 전과가 표준 전과보다 더 좋았다. 동아 전과는 표준 전과보다 조금 더 비쌌다. 새 학기가 되기 전 엄마는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찾았다. 헌책방거리를 어떻게 찾아갔는지 기억은 가물한데 책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빼곡히 꽂혀 있던 책방의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먼지로 가득해 매캐한 곳일 거라고 상상했던 헌책방은 내 책장보다 깔끔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 헌 책은 새 책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름이 책꼬리에 써 있거나 페이지마다 낙서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 주인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엄마는 여전히 새 학기가 되면 나와 동생을 데리고 헌책방거리로 갔다. 국민학교 때야 동아 전과 한 권이면 모든 과목 공부가 가능했지만 중학교는 과목이 많았다. 과목별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는 것은 아버지의 외벌이로 다섯 식구 살림을 꾸려가는 엄마에게 부담이었을 게다. 엄마와 나는 배다리 헌책방거리를 돌며 깨끗한 책 중 최근에 발간된 문제집과 참고서를 골랐다. 여러 권을 사다 보니 모든 책이 다 새 책 같을 수는 없었다. 수요가 적은 비주류 과목은 참고서나 문제집을 찾기가 힘든 경우도 있었다. 책을 다 사고 나면 마치 책 속에 담긴 공부를 끝마친 양, 마음은 벌써 뿌듯했다. 국민학생인 동생은 여전히 동아 전과를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세 식구 모두 책을 잔뜩 들고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탔다. 



중학교 1학년 수학 1단원은 그 당시에도 집합이었다. 문제집을 덮고 책의 옆면을 살펴보면 1단원 부분만 새카맸다. 어디까지 공부했는지 확연하게 티가 났다. 누군가가 열심히 공부했던 흔적이었다. 답을 썼다가 지운 자국, 중요한 부분에 그은 밑줄, 왜 그렸는지 모를 동그라미들이 여전히 있었다. 그 사람만큼 나도 열심히 해야지 생각하며 수학 문제를 풀었다. 문제집의 전 주인은 인내심과 성실함이 지속적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3단원이 되기 전에 전주인의 흔적이 책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때쯤 되면 공부에 대한 나의 열의도 같이 사라졌다. 깨끗한 문제집을 펴 놓으면 공부가 더 잘 될 법도 했건만 이유 없이 보기 싫어지곤 했다. 문제집의 전 주인과 공부 많이 하기 경쟁이라도 했던 건지 학기 초의 열의 가득했던 호승심은 전 주인이 남긴 흔적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져버렸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새 학기의 교과서는 내가 직접 싸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달력 종이 대신 폴리에스테르 비닐을 두 마 사서 교과서를 쌌다. 예전처럼 유약하고 허약한 교과서가 아니라서 표지를 싸지 않아도 교과서는 한 학기 내내 튼튼하게 견뎌낼 수 있어 보였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교과서를 깨끗하고 보기 좋게 다룰 수 있었다. 나는 교과서의 표지를 준비하는 새학기 의식을 혼자 계속했다. 중학교 때보다 더 많아진 과목이, 처음 해보는 보충학습이, 밤 늦은 야간 자율학습이 중학교 시절보다 더 많은 부교재를 필요로 했다. 엄마는 더 이상 우리를 데리고 헌책방거리에 가지 않았다. 나는 학교 앞 작은 서점에서 필요한 문제집을 직접 샀다. 집안 형편은 예전보다 나아졌고 새 학기를 준비하던 부모님의 의식은 사라졌다. 새 학기를 준비하는 것이 나만의 몫의 되면서 교과서와 참고서로 연결되어 있던 부모님과의 이음은 희미해졌다. 



이제는 교과서를 볼 일도 없고, 책이 망가질까 표지를 싸야 할 일도 없으며, 우리 집에는 종이 달력도 없다. 하지만 책을 싸던 아버지의 손, 헌책방에서 더 깨끗한 참고서를 고르던 엄마의 옆 모습, 누군가가 풀어놓은 집합 문제, 그리고 모서리가 접힌 시집에서 나보다 앞서 같은 책을 읽은 이들, 그리고 그 책을 소중히 여겼던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책 속에 남겨진 사람들 흔적에서 그들과 나 사이를 이어본다. 세상 사람들과 연결하는 방법은 책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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