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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ckie May 28. 2021

아버지의 마음은 삼계탕처럼 끓는다

어릴 적, 아버지 월급날인 25일은 온 가족이 외식을 하러 서울에 가는 날이었다. 할머니, 엄마, 동생과 함께 전철에 오르면 서울 가는 길은 여행길 같았다. 동생과 나는 자리에 앉게 되면 신발을 벗고 뒤를 돌아 동대문역에 도착할 때까지 특별할 것도 없던 창밖을 구경했다. 노량진역을 지나면 한강 다리를 지날 때 들리는 덜컹거리는 일정한 리듬이 좋았다. 남영역을 지나 지하로 들어서면 창에 비친 전철 안 승객들 모습을 무심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종로 5가 역이 지나면 엄마의 재촉이 시작되었고, 그 다음 역인 동대문역에서 내렸다. 아버지 회사가 있던 곳이다.



  아버지는 안 드시는 음식이 많다. 특히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도 돼지고기는 전혀 드시지 않는다. 유일하게 드시는 고기 음식이 바로 삼계탕이다. 그래서 명동에 있는 삼계탕 집을 갔다. 아버지를 동대문역에서 만나 어떻게 명동까지 갔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 결혼 전 명동의 건물에서 교환수로 근무했다던 엄마의 이야기 덕분에 명동이라는 장소만 명확하게 기억한다. 엄마도 결혼하기 전의 시절이 있었구나, 직업도 있었구나. 잘 되지 않는 엄마의 처녀 시절을 상상을 하곤 했다.



  삼계탕 맛의 기억은 희미하다. 그냥 평범한 삼계탕이었나 보다. 아버지가 한 그릇, 할머니랑 내가 같이 한 그릇, 엄마랑 동생이 한 그릇을 먹었다. 저녁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는지 늘 홀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가족들은 서로에게 삼계탕을 덜어주며 말없이 먹었다. 아버지는 늘 과묵하셨고 엄마는 식사 중  대화는 하지 않는 것이 예의범절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가족 식사는 조용했다. 게다가 가족들 모두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던 탓인지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드는 요란한 가족 외식도 아니었다. 



  삼계탕집을 나오면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들어갔다. 지하차도에는 31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이 우리나라 1호점이라고 말씀하셨다. 동네 슈퍼에서는 볼 수 없는 형광색 아이스크림이 좋았다. 민트색, 진분홍색, 무지개색의 현란한 아이스크림 색이 부드럽고 차가운 달콤함보다 더 좋았다. 가끔 엄마나 할머니의 재촉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건너뛰기라도 하면 그날은 무척이나 서운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허연색의 삼계탕과 다채로운 색의 아이스크림은 생소한 조합이긴 하다. 게다가 삼계탕 한 그릇을 먹으러 서울로 가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에겐 가족을 위한 일종의 의식이었다. 삼계탕은 월급날이라는 호사로움이 감당할 수 있는, 고기를 즐기지 않는 아버지가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보양식이었다.  



  아버지는 늘 무뚝뚝했고 가족들에게 살가운 소리 한번 하지 않는 엄격한 분이셨다. 성품도 식성만큼이나 까다로워서 어릴 적 나는 아버지가 어려웠다. 게다가 아버지나 남편으로서의 의무보다는 홀어머니 밑에서 6남매의 맏이로 특혜 받으며 커왔다는 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철이 들면서는 가족보다는 본인 형제들의 안위를 우선순위에 두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자식과 부인에게 무심해 보이는 아버지가 유일하게 가족을 챙긴다는 느낌을 받은 때가 아버지 월급날의 보양식 삼계탕이었다.



  25일의 명동행이 언제 끝났는지 기억에 없다. 나와 동생이 학교를 가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러 번 이사를 갔다. 어느 것이 발단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월간 가족 행사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나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어렵고 무뚝뚝한 분이다. 하지만 적어도 삼계탕에 대한 기억 덕에 아버지가 자식에게 품은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도록 도와주는 음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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