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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ckie May 31. 2021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드라마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즐기는 오락거리는 중국 드라마 비디오로 시청하기였다. 당시는 비디오 가게라는 것이 있어 해외드라마 시리즈를 비디오로 대여해서 볼 수 있었다. 대부분 이런 비디오는 불법 해적판이었다. 특히 우리 가족이 즐겨보던 드라마는 대만의 무협 작가인 김용이 쓴 <영웅문 3부작>이다. 책의 인기에 부응하듯 무협 소설은 홍콩과 대만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홍콩의 느와르 영화와 더불어 드라마로 만들어진 김용의 무협 소설은 꽤 유행이었다. 우리 집에도 책이 있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그리고 <의천도룡기>로 이어지는 영웅문 3부작은 무릇 범인들에게는 단순한 무협지였지만 나에게는 중국의 정통 역사이자 인생과 사랑에 대해 논하는 철학을 담은 책이었다.



아버지가 사준 <영웅문 시리즈>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은 나는 그 시리즈에 완전히 푹 빠져있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격투기를 좋아하는 아버지와 책 읽기가 습관화된 엄마, 무협지에 푹 빠진 나와 가족들이 함께 하는 일이라면 뭐든 좋아했던 내 동생이 김용 원작의 <영웅문 시리즈> 해적판 비디오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비디오 가게에 예치금 만원을 내면 비디오 하나당 500원을 차감하고 비디오를 대여했다. 비디오를 빌릴 때는 서로 가겠다고 우겼으면서 다 본 비디오를 반납하는 일은 서로 미뤘다. 한 시리즈는 주로 50편도 넘는 대하 드라마식의 시리즈물이었기에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비디오 가게의 아르바이트 하는 언니랑 안면을 잘 터 놓으면 5개 대여에 하나씩은 덤으로 더 빌려 주곤 했다. 아르바이트생이 바뀌면 가족들 모두 아쉬워하곤 했다. 

비디오를 틀면 가족 모두 TV 앞에 모여 앉아 책이랑 드라마가 어떻게 다른지, 어느 부분이 더 재미있는지, 배우들이  소설 속 등장 인물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논하면서 비디오를 즐겼다. 김씨 집안이라면 누구나 약간씩은 가지고 있는 안면인식장애(?) 탓에 초등학생이던 남동생은 ‘아까 나온 저 여자는 왜 또 이 장면에 나오느냐’며 의아함을 자주 표현했다. 그때마다 나는 한숨을 쉬며, 하지만 귀찮아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등장인물들을 설명해주곤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영웅문의 가장 인상적인 시리즈의 주인공은 <신조협려>의 주인공 외팔 검객의 양과 역을 맡았던 당대 최고의 홍콩 배우인 유덕화이다. 당시 홍콩영화와 장국영에게 푹 빠져있던 나는 왜 하필 장국영이 아닌 유덕화인가를 시리즈 내내 아쉬워했다. 아마도 장국영을 주인공으로 만든 시리즈가 있었다면 잠 못 들고 열광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이 부모님과 함께 무협 드라마를 어찌 그리 즐겼는지 의문이다. 어쨌든 어린 날의 가장 많이 떠오는 장면은 무협 드라마를 다 같이 즐기는 TV 앞의 우리 가족이다. 



몇년 전 친정집이 갑자기 공사를 하게 되면서 친정 부모님이 2주일간 우리 집에 머무셨다. 고등학생인 손녀들과 사위 눈치 보느라 편치 않은 듯 했지만 나에게는 잠깐이라도 부모님과 다시 살아보는 그 시간이 꽤 소중했다. 



어느 날 밤 안방에서 나와보니 엄마가 TV 소리를 작게 줄이고 중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평소 나도 즐겨 보던 프로그램이라 엄마와 같이 시청했다.     


 

“엄마도 이런 드라마를 보는지 몰랐네.”



“얘는... 이거 진짜 재밌어. 내가 요새 이거 챙겨보는 재미에 산다.”      



드라마 제목은 <삼생삼세 십리도화>였다. 신선들의 삶과 사랑을 다루는 선협물 드라마였는데 요새 이삼십대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를 엄마가 꼬박꼬박 챙겨 본다는 게 의외였다.


”엄마, 옛날에 우리 중국 드라마 비디오로 많이 봤잖아.“ 



“아유 그럼. 그때 유덕화 주인공으로 나오던 거 뭐냐. 그거. 아주 재밌었는데.”



”<신조협려>. 그거 유덕화가 주인공 양과로 나왔잖아. 정엽이가 그거 보면서 유덕화가 오른팔 앞으로 잡아맨 거 다 보인다면서 어떻게 저게 외팔이냐고 볼 때마다 궁시렁 대고. 그때 되게 웃겼는데“ 



“호호호, 맞다. 생각나네. 너는 아직도 중국 드라마 많이 보나 보다?”     



이렇게 시작된 모녀간의 중극 고장극(사극) 드라마 토크는 계속되었다. 



참 이상하다. 아주 옛날 기억이고 별거 아닌 기억인데다가 사소한 기억인데 나에게는 너무나도 생생하니 말이다. 어딘가를 큰마음 먹고 놀러 갔던 일은 흐릿하면서도 이런 소소한 기억은 잘 나는 걸 보면 나에게는 이 기억이 더 소중했나 보다. 게다가 아직도 엄마와 공유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옛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가 있다는 것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아직도 중국 고장극을 너무나 애정하는 나의 근원을 찾아보면 그 속엔 어릴 적 가족들과 즐기던 드라마의 추억이 이유 인지도 모른다. 중국 고장극을 시청하는 것은 나에게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자 소중한 취미이다. 나는 아직도 어릴 적 즐겨 보던 <영웅문>을 다시 만든 <2017 사조영웅전>도 보면서 감동하고 <2019 의천도룡기>를 보면서 열광한다. 다만 이렇듯 중국 드라마에 집중하는 나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지금의 가족 남편과 딸들에게 서운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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