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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ckie May 31. 2021

전방위적 독서

아홉 살 때 우리 집에는 전래동화 전집이 있었다. 『효녀 심청』부터 『혹부리영감』까지 다양한 우리의 신화, 전설 그리고 민담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도깨비나 귀신이 등장하는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이야기는 나를 사로잡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벌어질 것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매력적이었다. 특히 원색으로 선명하고 테두리가 분명하여 눈에 띄게 표현된 삽화는 자극적인 이야기와도 잘 어울렸다. 이야기가 재밌고 삽화가 마음에 들어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이야기는 『여우 누이 이야기』였다. 여우 요괴 동생으로 인해 한 집안이 몰락하는 비극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권선징악의 주제가 실현되는 스토리는 잔인하면서도 슬펐다. 여우 동생을 물리쳤지만 가문은 몰락했고, 너무 늦게 진실을 깨달아 부모님과 형제들이 이미 죽고 말았다.  모든 역경을 막내아들은 현명하게 이겨냈지만 남은 현실은 비극이었다. 어려움을 극복해도 잘못된 판단으로 어그러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주제가 슬퍼도 좋았다. 비현실적인 세상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게 해준 전래동화는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게 해준 첫 번째 책이었다. 



열세 살이 되던 해에는 추리소설에 푹 빠져있었다. 지금 기억해보면 그것은 일요일 밤 10시 KBS2 채널에서 방영해준 드라마였다. 섬에 갇힌 10명의 사람이 하나씩 죽는 이야기는 일요일 밤을 공포로 몰아넣기 충분했다. 다음 주에나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와 살아남는 생존자의 여부는 잠 못 이루게 궁금했다. 마지막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드라마의 제목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에 제목을 꼭꼭 새기듯 기억해놨다. 



다음 날 학급문고를 찾아보니 약간은 너덜한 빨간 표지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꽂혀 있었다. 책을 정독하고 나서 더 흥미진진해진 마음으로 다음 일요일을 기다렸다. 이것이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전에도 추리소설은 좋아했다. 그때까지 읽었던 추리소설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와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루팡 시리즈』였다. 친구 집에 꽂혀 있던 검정색 표지의  『셜록 홈즈 시리즈』 전집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나는 셜록 홈즈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다행히 너그러운 마음의 친구 는 모든 시리즈를 빌려 주었고 그 덕에 완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를 만난 이후 셜록 홈즈는 잊었다. 심리묘사를 자세하게 해주고 다양한 인간 군상을 소개하는 부분은 문학작품을 읽는 것 같았다. 보잘 것 없는 단서 하나로 범인을 추리해가는 에르큘 푸아로와 반짝이는 추리능력에 감탄했다. 뜨개질 거리를 들고 다니며 수다 떨기를 좋아하지만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들여다보는 할머니 미스 마플의 추리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30여 년 지난 지금도 추리소설 읽기는 여전히 즐겁다. 올해 세운 목표는 황금가지에서 발간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전집을 완독하는 것이다. 50권도 넘는 분량이므로 한 두 해로 끝날 계획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작가이므로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열세 살 때에도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여전히 놀라운 작가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영웅문 1부』를 사오셨다. 표지만 보아서는 중국 역사책 같았다. 『영웅문』은 이제는 유명해진 무협 소설의 대가 김용의 대표작 『사조영웅전』의 해적판이다. 우둔하지만 강직한 곽정이 절대신공(絕對神功)을 익히고 아버지의 복수를 해내며 남송을 몽고에서 구하고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못해 신묘했다. 나의 권유로 『영웅문』을 읽은 친구와 늘 영웅문의 등장인물들과 무림(武林)의 대소사(大小事)에 대해 논했다. 심지어 중국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는 『영웅문』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들이 얼마나 역사에 근거했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친구는 픽션과 논픽션을 혼동하는 나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영웅문』은 중국역사서가 아니라 무협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열여덟 살 고등학교 2학년의 나는 사춘기의 최고 정점을 맞았다. 학교는 겨우겨우 다녔고 공부도 친구도 가족도 싫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가 누구인지만 걱정했다. 지금 하고있는 모든 일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때 만난 책이 『데미안』이다.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에 대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하던 이 책은 혼란의 정점에 서 있던 나에게 인생의 정답을 이야기해 주었다.



싱클레어의 방황과 데미안의 선악을 초월한 가치관,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두 개의 세계, 에바 부인의 지적 성숙함. 그 모든 것은 나의 이해 너머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이라는 책 자체는 나에게 삶의 해결책이었고 구원이었다. 그동안 갑갑했던 내 속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지금은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기 짝이 없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는 문구도 눈에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 써보았다. 교과서 귀퉁이마다 공책 끝자락마다 그 구절을 써넣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투쟁하는지, 어디서 무엇을 깨고 나오고 싶어하는 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끝도 없이 고민만 했다. 



좋아하는 작가는 항상 많았고 늘 바뀌었지만 애정의 절대량으로만 측정하자면 사춘기 시절 사랑했던 헤르만 헤세는 누구와도 겨룰 수 없다. 순수함의 정도로 판단해도 어느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다. 그래서 그 이후 헤르만 헤세 작품을 계속 읽었다. 



두 번째로 읽은 헤세의 책은 『지와 사랑』이다. 이 책의 원제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된 후였다. 지를 대표하는 나르치스와 사랑을 대표하는 골드문트의 대비되는 삶을 통해 내가 살고 싶은 것은 누구의 삶인지 고민했다. 



세 번째로 읽은 헤세의 책은 『싯다르타』였다. 자기에게 이르고 싶은 욕구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노력한 싯다르타의 삶이 부러웠다. 고귀하고 우아한 고행과 명상이 아니라 삶의 희노애락의 극한을 경험하고 나서야 진정한 자기에게로의 길을 찾은 싯다르타의 경험을 읽으면서 지금 나의 알 수 없는 감정의 들썩임이 나를 찾아가는 고행의 길이라는 유치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 다음부터는 어떤 순서로 헤세의 책을 읽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데미안』과 비슷하다고 느낀 『황야의 이리』를 읽었고 헤세의 시집을 읽으면서 감정이 아닌 이성에 호소해도 감동할 수 있는 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알 유희』를 읽다 그만두었을 때 즈음, 대학에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춘기 시절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공부만 제대로 하지 않았을 뿐, 학교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다녔으며 크게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은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미숙한 나의 모습은 부족해서 싫었다.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은 고등학생의 삶은 더 싫었다. 그나마 헤세라는 말뚝이 내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나를 지켜주었다. 하지만 헤세의 무엇이 나를 지켜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유치하고 겉멋 가득했던 나에게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것만 확실하다.



작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헤르만 헤세 전집』을 구매했다. ‘두 세계’로 시작하는 『데미안』의 1장을 읽으며 예전에 느꼈던 충격과도 같던 깨달음이 기억났다. 어릴 때는 프란츠로 대표되는 세계에 두려움과 경멸을 느꼈는데 지금은 내가 그 세계에 반쯤 발을 걸쳐 놓았다는 자각에 놀랐다. 마지막 장을 끝냈을 때는 여고 시절 가슴으로 읽었던 『데미안』을 철저하게  머리로만 읽은 내가 느껴졌다. 문장 하나하나에 전율하고 감동했던 나에게 『데미안』은 약간은 진부한 성장소설처럼, 너무 많이 언급되어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클리셰처럼 느껴졌다. 세상엔 나이에 맞춰서 읽어야 하는 책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스물세 살에는 공지영의 책을 처음 읽었다. 『고등어』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으며 처음으로 우리 소설 읽는 재미에 빠졌다. 사회생활을 목전에 둔 사회생활 준비생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처음으로 고민했다. 지금은 공지영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들지만 이 십 대에만 해도 가장 좋아하던 작가 중 하나였다. 



둘째를 낳은 스물아홉 살 때는 육아서 『삐뽀삐보 119 소아과』를 성경처럼 맹신하며 읽고 또 읽었다. 심실중격결손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큰아이와 두 살 터울의 작은 아이를 워킹맘으로 양육하는 일은 서툰 초보 엄마에게 많은 육아 지식과 인내심, 그리고 시행착오를 필요로 했다. 당시 나에게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건강하게 키운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삐뽀삐보 119 소아과』는 어디다 물어야 봐야 할지 알 수 없는 많은 육아 건강 관련 지식을 초보 엄마인 나에게 알려주었다. 애들이 아파도 안 아파도 그냥 잡지 읽듯 읽었다. 열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병원에 가기 전에 확인해 봐야 하는 게 뭔지 기초적인 상식부터 알려 주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연례 행사처럼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하던 일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끝났다. 그리고 『삐뽀삐보 119 소아과』도 첫 아이를 낳은 학교 동료에게 물려주었다.  



그 이후에는 소위 엄마들 사이에서 입소문 탄 육아서를 주구장창 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문적인 지식이 담겼다기보다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가벼운 책들이다. 학술적으로 뒤받침 된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개인의 성공적인 경험담을 떠벌리듯 써 놓고, 결국은 각종 아동서적과 교구의 판매로 이어지는 홍보물의 일환일 뿐이었던 육아서를 홀린 듯이 읽었다.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특목고와 명문대 운운하는 양육서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다. 



결국 아이를 키우는 것은 누군가의 성공 경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장 과정이 남들과는 같지 않고 나만의 개성을 지녔듯이,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나만의 육아법과 양육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임을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야 깨달았다. 결국 삶이란 나만의 고유한 것을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육아에도 적용되는 인생의 진실이었다.  



서른네 살 즈음엔 자기계발서을 열심히 읽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10년 가까이 되는데도 여전히 힘들었다. 말콤 글래드웰의 책에서 시작해서 사회생활을 위한 심리학에 이르는 책까지 나의 직장 생활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었다. 각종 리더십을 키워준다는 책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덜어준다는 책, 그리고 직장에서 적을 만들지 않고 승리하게 해준다는 다양한 대화법에 대해 읽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책은 『직장신공』이라는 약간은 어이없는 제목의 직장생활개선을 위한 자기계발서이다. 사회라는 무림강호(武林江湖)를 홀로 누비는 상처받은 외로운 검객, 샐러리맨에게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가 되기 위하여 필요한 절대신공(絶對神工)을 전수해주는 이야기에 몸과 마음을 다해 감동했다. 이런 책에 빠져들 만큼 당시에는 직장 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자기계발서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질리도록 읽던 자기계발서 속에는 개인에게 모든 것을 책임 지우는 부당함과 불공정한 사회적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불과 사 오 년 전 일이다.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고 사회적 책임에는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의 역할이고 이런 류의 책을 맹신할수록 이 사회가 점점 더 살기 힘들어 진다는 걸 깨달은 순간 분노했다. 인생의 모든 잘잘못의 책임은 오로지 개인에게 있다는 자기계발서가 개인에게 지우는 과도한 짐을 깨달은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자기계발서를 믿지 않는다.



자기계발서에 빠져있던 칠 팔 년 동안 질리지 않게 읽은 책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이다. 세상에 다작을 하는 작가는 많다지만 읽어도 읽어도 새로운 작품이 나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생산력과 창의력은 놀라울 뿐이다. 고백하자면 결국 나의 독서 속도는 그의 창작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어느새 그의 소설은 서점의 신작 코너에 꽂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삼십 편 가까이 읽었으니 좋아하는 작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최근작보다는 초기작을 훨씬 더 좋아한다. 초기작에 사회의 각종 문제를 꼬집고 질문을 던지는 사회 추리소설의 경향이 더 강하다. 나는 본격 추리소설보다는 사회 추리소설에 더 흥미를 느끼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방황하는 칼날』과 『백야행』이다. 



마흔두 살 되던 해는 나의 독서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혼자 읽고 즐기던 것에 지쳐 누군가와 책 이야기를 실컷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독서 모임을 시작한 해이다. 그때의 인연으로 만난 첫 독서 모임 ‘꿈·길’은 사 년이 넘은 지금도 참여 중이다. 



무작정 인터넷에서 집 주변에서 참여 가능한 독서 모임을 찾아 용감하게 도서관을 통해 독서 모임 리더에게 연락을 취하고 모임에 참여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첫 독서 모임의 선정 도서는 『나만의 방』과 『이갈리아의 딸들』이다. 모임 삼일전에 소식이 접하고 2박3일만에 책 두 권을 독파하느라 애먹은 기억이 난다. 더욱이 『이갈리아의 딸들』은 나에게 무척 생소했고 『나만의 방』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모임 자체는 만족스러웠고 2020년 코로나로 인해 모임이 어려운 현재까지도 온라인으로 유지해 오고 있다. 



오프라인 독서 모임이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그 이후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읽기 모임’과 ‘온라인 독서 모임’ 두 군데에 더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서 모임에 참여한 이후 독서의 폭이 상당히 넓어졌다. 혼자서는 절대 읽을 것 같지 않은 영역의 책도 읽게 되었고 어렵고 두꺼워서 절대 읽지 못할 것 같은 벽돌책들도 하나씩 독파해 나갔다. 덕분에 책 읽는 습관도 많이 바뀌었다. 책을 정독하기 시작했고 궁금한 건 메모하고 중요한 건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식으로 독후활동을 시작했다. 읽고 난 책의 독후감이나 서평을 반드시 작성했다. 독후활동을 시작한 이후 느낀 것은 그동안 능동적 활동이라 여겨왔던 독서도 쓰기에 비하면 수동적이기 그지없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고백할 것은 책 사는 속도가 책 읽는 속도보다 빠르고 책 읽는 속도가 독후활동 하는 속도보다 빨라 늘 독후감을 써야 하는 책들이 쌓여 있다는 것이다. 읽어야 할 책은 더 많이 쌓여 있지만 말이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온라인 독서 모임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만난 것은 삼 년 전이다. 이름도 처음 들어 보는 책과 작가였지만 완독한 후 감동을 받아 책을 구입했다. 사십 대의 어느 날 신비한 타인으로부터 깨달은 일상의 허무함, 다른 이의 삶의 궤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나의 존재 의미, 언어학자로서 언어가 주는 힘에 대한 서사는 영어 교사라는 업을 삼은 사십 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상의 지루함에서 찾은 원석과도 같았다. 이건 나를 위한 이야기라고 느꼈다. 그 이후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내가 가장 애정하는 인생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코로나로 뒤숭숭한 2020년에 나의 독서 인생에 새로운 단초를 하나 접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덕에 활발해진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독서토론 강좌에 다수 참여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독서 모임 활동에서는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전 논제에 대하여 토론하는 형식은 도전적이긴 했지만 많은 것을 남기는 경험이었다. 자유 형식의 독서 모임보다도 훨씬 깊이 있고 매력적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모든 것에는 분명 장·단점이 공존하는 게 맞다. 코로나 일상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현재 나의 독서는 전방위적(全方位的)이다. 고전부터 장르 소설에 이르기까지 관심 가는 책이라면 모두 즐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 보일드와 필립 K. 딕의 SF 소설도 즐기고 괴테의 희곡과 같은 고전에서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과 같은 우리 젊은 작가들의 책도 읽는다. 잘 이해 가지 않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끙끙대면서 읽고 킥킥대면서 중국 선협 소설이자 퀴어라고 부르고픈 『마도조사』마저 즐겁게 읽는다. 어쩌면 이제는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읽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독서는 반평생의 나를 키웠고 가르쳤고 위로했고 즐겁게 해주었다. 남은 반평생도 나는 여전히 책을 읽을 게다. 나를 키워주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즐겁게 해줄 더 많은 책을 만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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