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가 단지 한 시합의 패배를 넘어 미래를 언급했던 좌절의 순간, 현장에 있었다. 뉴저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반 거리의 잭슨빌. 마음먹지 않는다면 선뜻 내키지 않는 여정이었지만, 한국인의 UFC 타이틀전을 함께하고 싶은 욕심이 나를 움직였다. 정찬성과 챔피언 볼카노프스키의 시합은 마지막 경기. 시합 전까지 도박사들의 경기 배당률이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었는데 그 숫자는 정찬성에게 다소 절망적인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 나는 한국과 독일의 월드컵 2:0 스코어만 계속해서 생각했다. 보란듯이 엎어주마.
코리안 좀비 티셔츠를 현장에서 산 뒤 그 자리에서 바로 갈아입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좀비”를 열렬히 외쳐줬다. 해외에서 태극기를 처음 발견했을 때 느꼈던 뭉클함이 올라왔다. 나와 같은 티셔츠를 입은 관중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반면 볼카노프스키 티셔츠를 입은 팬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경기는 기세 싸움이라는데 적어도 관중들의 기세는 정찬성 쪽으로 기울었다. 다소 도취된 마음으로 앉아 있던 찰나, 경기장이 파란 조명으로 물들었다. 코리안 좀비 드디어 출격. 정찬성의 등장음악인 Cranberries의 Zombie가 경기장에 웅장하게 울려퍼졌다.
스크린으로 보이는 정찬성의 몸놀림은 가벼워 보였다. 약 10년 전 있었던 조제 알도와의 타이틀 매치 때보다 여유도 훨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과 마음,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내 성대도 마음껏 소리지를 채비가 돼 있었다. 혼자 온 뻘쭘함 때문에 그런지 다른 시합 내내 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시합은 도저히 그렇지가 못하다.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 목소리 하나 뿐이다. 다른 관중들과 함께 “좀비”를 쩌렁쩌렁 외치며 경기 전 분위기를 달궜다. 두 선수 글러브 터치 완료. 이제 그들은 수개월간의 훈련, 그 훈련을 함께해준 수많은 동료들, 감량의 고통, 이 모든 시간을 걸고 몸을 던져야 한다.
경기 양상은 시종일관 비슷하게 흘렀다. 키와 리치가 긴 정찬성이 오히려 거리를 좁히는 쪽을 택했다. 상대의 펀치를 이끌어내며 카운터를 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작은 볼카노프스키가 거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빠르고 정확한 잽 때문에 파고들 틈이 없어 보였다. 꾸준히 쏟아지는 비와도 같은 펀치에 정찬성의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반격의 여지는 없었다. 4라운드 초반, 심판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볼카노프스키의 TKO 승. 코리안 좀비는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한참동안 쏟은 눈물은 패배의 슬픔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눈물인 것 같았다.
긴 시간을 걷고걸어 드디어 바라던 문 앞에 선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좌절했다. 문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앞으로도 문을 열 수 없을 것 같은 자신을 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시간을 방황하고 배회하며 알게된 사실이 있었다. 실은, 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개 였다는 점. 그리고 어떤 문을 연다해도 도달하는 문 너머의 세상은 차이가 없다는 점. 한 시합의 패배로 미래의 가능성까지 선을 그어버린 그였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 믿고 싶다. 격투기 선수로서 목표의식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갖는 출발점. 그저 격투기가 좋아 열심히 했던 그 어린 날과 마주하며 격투기 선수로서의 삶을 즐기다 보면, 또 다른 문을 만나 비로소 열게 되지 않을까. 그 날의 그는 지금의 모습을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운이 좀처럼 가시질 않아 정찬성의 퇴장 후에도 한참을 서 있었다. 그의 얘기는 나의 삶에도 질문을 던져줬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이후의 인생엔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무엇이 진정한 목표일까. 어떻게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까. 생각이 돌고돌며 얻게 되는 결론은 그냥 삶처럼 사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즐기되 결과에 좌절하거나 흥분하지도 않는 삶. 최대한 지속가능한 그런 삶. 그렇게 그 길을 꾸준히 즐기다보면 삶은 나에게 값진 행복을 허락할 것 같다. 최고의 성취를 이루는 것 보다는, 많은 기억들을 안고 가는 삶이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