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0.
무엇이 저를 움직였을까요. 고상한 척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패배주의가 길어올린 에너지였던 것 같습니다. 스포츠 PD를 꿈꿨던 저는 여러 방송사의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 시험을 위한 이야깃거리가 필요 했습니다. 아무도 가지지 못한 것을 위해 저는 여행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에 가면 내가 커져 보일 줄 알았습니다. 그 곳이 브라질이었습니다. 우리의 겨울이 여름이고, 우리의 낮이 밤인 곳. 그 머나먼 땅에서 3개월 간의 배낭여행을 계획 했습니다. 왜 3개월이냐면 비자 면제 한도였을 거예요.
솔직히 계획이라 말하기도 쪽팔립니다. 2006년이었는데, 당시엔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브라질에 대한 정보도 쉽게 얻기 어려웠습니다. 일단 거기에 도착하면 이렇게 저렇게 알아서 잘 굴러갈 줄 알았습니다. 마의 3박자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저는 아무런 대비가 없이 비행기표만 달랑 끊었습니다. 내 인생의 첫 비행기표. 나이 26에 드디어 국내로부터 첫 도피(?)를 하게 된 겁니다. 네, 도피가 맞습니다. 좌절로부터의 도피. 막연한 미래로부터의 도피.
인천공항. 다음은 체크인 카운터에서의 대화입니다.
"브라질에 아는 사람 있어요?" "아니요"
"배낭 외에 다른 짐은 안 가져가세요?" "네"
"90일 동안 가는 거 맞죠?" "네"
"짐 하나 가지고 90일 동안 버틸 수 있겠어요?" "짐 많으면 못 돌아다녀요"
에어 캐나다 남자 직원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반문할 만도 했습니다. 배낭이 배낭여행자의 백팩이 아니었거든요. 브랜드는 이스트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네, 요즘 학생들이 레트로 감성으로 들고 다니는 그 조그만 가방이요. 첫 해외인 주제에 뭘 안다고 짐의 가벼움을 살짝 항변 했습니다. 말 그대로 무식하니 용감한 때였습니다. 배낭 안에는 여름 옷가지 몇 개 중심(?)으로 들어 있었습니다. 아, 책 2권도 있었어요. 브라질 여행 가이드북인데 일본책을 번역한 노란 표지였고요. 한국외대에서 펴낸 "포르투갈어 회화"도 챙겼습니다.
공항에 안 가볼 수록 공항에 더 빨리 가잖아요? 일찍 도착하여 공항에서 많이 기다렸을 겁니다. 그런데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게 신기하고 좋아서 천둥벌거숭이처럼 흥분하지 않았을까요. 아, 탤런트 김영철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무슨 드라마 촬영중이셨어요. 유명한 사람을 보니 흥분지수가 더 올라갔을 것입니다. 지금의 제가 그 때 저를 보았다면 엄청 창피했을 것 같네요.
그렇게 저는, 미지를 향해 떠났습니다. 2006년 10월 30일 오후 5시였습니다. 에어 캐나다. 밴쿠버와 토론토를 경유하여 상파울루의 과를류스 공항에 도착하는 약 30시간의 여정이었습니다. 미국이 더 가깝지만 비자문제 해결이 필요 했을 것입니다. 캐나다는 비자 면제국이었거든요. 당시 노트에 처음 기록한 게 비상 연락망이었네요. "브라질 한인대학생회, 대표: 김OO, Bom Retiro (55-11) 3224-X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