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려우면 글을 쓴다. 글까지 써야되겠다는 생각과 결심에 평소엔 거리를 두며 빙빙 돌다가도,
하염없이 두려운 날이 오면 그것이 나를 글로 인도하는 에너지가 되는 거다.
두려움의 형태는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외양이나, 그 안에 있는 속살은 언제나 다를 게 없다.
내가 실망스러운 사람이 될까봐 두렵다.
결국 이건 나라는 사람을 밖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 같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밖에서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가 나의 상상으로 형성된다는 것의 문제이다.
상대방의 진짜 속내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알기가 쉽지 않다.
나는 그저, 인간은 그저, 몇 가지의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나라는 인간의 인간평에 대한
결론을 길어올려 그것으로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정할 뿐이다.
즉, 상대방과 내가 있었던 몇 가지의 대화를 기반으로 상대방이 나라는 인간을 판단한다는
주관적 판단이 문제이다. 그래서 상대방은 실은 생각이 전혀 도달하지 않은,
나를 비방하고 비난하는 무언가의 거대한 괴물을 상상하며 그 괴물이 나라는 마음의 숲 속을
이리 헤짚고 저리 헤짚고 다니게 된다. 그 숲 속에서 괴물을 피해 여기저기 도망다니다 마침내 만난
상대방은 실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 그렇게 큰 시간의 고민을 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비난과 증오도 없었다.
이는 다소 허무한 일이며 상대방에게 인간적으로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와 상상의 과정을 거치지 않기엔 나 같은 사람한테는 뇌신경이 너무도 복잡다단계하게 엮여있는 느낌이다.
두려움을 궁극적으로 이겨내는 방법은 두려움을 뛰어넘는 것 같다. 뉴런을 뛰어넘는 것이다.
내가 실망스러운 사람이 되든, 그렇지 않든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라는 인간은 다년간의
훈련과 노력이 있었어도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더 생산적인 방법은 그 두려움이
내 삶을 더 바람직하게 만들 수 있도록 영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 실망할까봐 두려우면, 상대방이 실망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내가 느끼지 않도록 노력을 거듭하면 된다. 두려워서 노력하고, 두려워서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결국에는 뭔가를 이룬다. 두려움에 의한 수동적이며, 다소 노예근성과도 흡사한 노력이겠으나 이 상황에서 발휘되는 유일한 영리함은 이 수밖에는 없다.
"을" 비즈니스를 오래할 수 있었던 비결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두려움은 나의 힘이다. 아니, 나의 힘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