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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뜰날 Oct 22. 2023

엄마가 보고 싶은 날.

2023.5.21 그날의 회상.

2주 만이었다.

척추시술을 한 뒤 둘째 언니 집에서 재활요양을 하고 있는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엄마가 허리를 굽힐 수 없는 상황이라, 목욕을 하지 못해서 목욕을 해드려야 된다는 핑계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의정부 언니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요양의 목적으로 아픈 당신의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언니집에 있는 것이지만,

딸의 내 입장에서는 전라도가 아닌, 차로 1시간 거리인 언니집에 있다는 게 내심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역시 나도 이기적인 딸인 건 어쩔 수없다.

엄마보다 내 마음 기쁜 게 우선이니까.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것뿐인데도 심리적으로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가까운 거리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이런 마음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엄마의 마음 해결사인 넷째 언니도 공감했다.


엄마가 날 낳은 43살, 그 나이에 넷째 언니가 늦둥이를 만났다.

선천성 담낭관종이 있어서 산후 조리원에서 눈물로 지새우며 불안감으로 지냈던 날들이 많았는데,

백일쯤 수술을 받은 아이를 안고도 엄마에게 보여드리지 못했다. 아이가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장거리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아이의 모습을 엄마에게 영상통화로만 보여주며 서운한 마음을 달랬던 언니다.


그런 엄마가 둘째 언니네 오게 되니, 엄마가 아픈 건 좋은 일은 아니지만, 내심 마음이 좋았다고 했다.

영상통화가 아닌, 늦둥이 아들을 직접 보여주고, 할머니 손을 잠시나마 타게 할 수 있다는 게, 기쁘다고 했다.


그렇게 가까이에 있게 된 엄마의 요양 기간은 나와 넷째 언니의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시간을 주기도 했다. 


딸로서 느끼는 거지만

엄마라는 존재는 내가 엄마가 되고,

내 아이와의 시간이 많아질수록 더 그리워지는 존재임이 틀림없다.




엄마를 씻겨드리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7년 전, 딸아이가 6개월쯤 됐을 때

엄마는 첫 번째 허리 골시멘트 시술로 우리 집에서 6개월간 재활 요양을 하셨다. 

그때도 엄마 거동이 어려워져 나는 딸을 오빠에게 잠시 맡기면서 목욕을 전담했었다.


그때는 우리 집에 있어서 3일에 한번 씻을 수 있었는데

지금 둘째 언니 집에서는 언니도 몸이 좋질 않아 씻겨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형부도, 엄마 요양을 돕고 있는 친오빠도 다 남자라서 더 어려운 상황이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엄마 손을 잡고 천천히 욕실로 들어갔다. 허리 시술로 바닥에 앉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둘째 언니는 적당한 의자를 준비해 뒀다. 목욕물 온도를 체크해 가며 적당하다 싶어서 엄마의 몸에 샤워기를 가져다 댔다.


"아따~ 물 뜨겁다잉."

엄마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뭐시 뜨겁데? 딱 좋은디? 이게 뜨겁다고?"

엄마말에 이어 내가 대답했다.

이래 봬도  몇 년간의 두 아이의 육아 짬으로 목욕물 온도 체크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내 손에 미지근한 물이 엄마는 깜짝 놀랄만한 온도였다니 엄마의 반응에 나의 육아짬이 무색해졌다.


다시 미지근한 물 온도를 맞춰 엄마몸에 가져다 댔다.


"아따~ 뜨겁당게~젊은 너랑 나랑 피부가 같가니~ 잉자 늙어서 거죽도 얇아져서 애기 피부가 되브렀어~ 너도 나이들믄 알 것이다~"


엄마의 마지막말이. 나이 들면 알게 된다는 그 말이,

이제 엄마의 목욕을 시켜드릴 일이 앞으로 별로 없을 수도 있겠다는 먹먹한 마음이 올라오며

내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엄마가 6남매 중 다른 자식들보다 아플 때, 목욕을 전담했던 나를 내심 기다렸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언니집에 있는 동안 엄마는 불편해도, 못 씻고 찜찜해도 참아가면서 계셨을 거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7년 전 우리 집에 있을 때도 그랬다. 불만보다는 뭘 해주든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자신의 아픔이 죄를 짓는 것인 양 자식 고생시킨다는 말을 되풀이 하시면서,

일부러 불편함을 말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견뎌내셨다.


아마 엄마는 그렇게 평생을 살아오셨던 거겠지.


엄마의 그런 삶의 대한 체념, 아니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맞지 않다.

수용이라는 말이 적절할까.

그냥 늙어감을, 불편함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이미 당신은 나이 들어가며 매년, 매일 자연스럽게 아셨을 테지.


샤워기로 천천히 몸을 씻어 내려가며 거품을 잔뜩 낸 샤워볼로 구석구석 엄마의 몸을 씻어 내려갔다.

아직도 쪽진 머리를 하는  엄마의 머리숱은 7년 전과 다르게  내 엄지손가락 둘레만큼도 안될 만큼 적어져 버렸다. 살이 빠져버린 피부는 축 늘어졌고, 얼굴의 검버섯은 더 번져있었고 주름은 깊게 더 파였다.


반듯했던 등은 그사이 두 번의 척추시술을 받는 동안 고생해서 그런지 이미 많이도 굽어져 버렸다.

등 척추자리에 골 시멘트 시술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고, 굽은 등으로 허리 보조기가 초반에 맞질 않아 발진이 난 게, 욕창이 될 뻔했던 흉터도 오백 원 동전 크기만큼 남아있었다.


그동안의 세월이 흔적들이, 엄마의 아프고 고생했던 몸의 기록들이, 엄마의 몸에 그대로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엄마 몸과 얼굴, 머리카락과 손과 발까지 시원하게 닦아 드리고 싶었다.

평생 고생한 엄마의 몸과 마음에 늘 자리잡고 있는 자식들의 걱정들까지, 조금이나마 씻겨 내려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목욕을 마치고 젖은 머리를 말려주니 엄마는 평소대로, 가르마를 곱게 가운데로 타고 쪽 찐 머리를 올린다.

평생을 했던 쪽 진 머리가 지겹지도 않은지 자연스럽게 그 머리를 올리고 정갈하게 양손으로 잔머리를 쓰다듬는다. 아픈 것을 빼면 그 모습은 그저 한결같은 엄마의 모습이다.


발은 씻었지만 여전히 갈라져있고 각질도 많았다. 거친 발에 바셀린을 바르고 양말을 신겨드렸다.

그리고, 엄마 손톱을 자르기 위해 손톱깎이를 찾았다.


내가 손톱 자르는 게 내심 불안한지 넷째 언니가 손톱은 잘 잘랐다면서

엄마는 불쑥 넷째 언니 이야기를 꺼낸다.


"느그 언니가 손톱은 잘 짜른디~ 귀지도 안아프게 잘 파고~ 이따 온다고 하도만"

나름 두 아이의 엄마로 있는 나도, 그저 엄마 눈에는 덤벙대는 막내딸로 보이는 건 여전한가 보다.  


넷째 언니야 엄마 마음 알기로는 우리 식구 중 1등인 걸 누가 모를까.


얼마 전 낳은 아이가 이제 막 돌이 지나서 엄마껌딱지로 늦은 나이 육아에 몰입하느라, 언니도 체력이 많이

지친다고 했다.


"아따~ 언니 재빈이 보느라 바빠~ 껌딱지 되가꼬~ 내가 해주께 가만있어봐 봐~ 쫌~"


그렇게 반 협박으로 엄마의 손톱을 깎았다.


손톱 자른 게 바닥에 남아있진 않은지. 머리카락이 어디 또 붙어 있진 않은지 바닥청소를 잘하라고 하고,

목욕 뒤에 욕실 마무리 청소를 깔끔히 해두었는지 연이어 잔소리를 한다.


엄마의 그런 잔소리를 듣고 있자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이런 시간이 언제 또 있을까.

엄마의 몸을 씻겨드리고 물이 뜨겁다고 물 조절 못하냐는 투정을 받고 손톱을 잘라보고,

잔소리를 받는 이 시간이 앞으로 엄마 인생과 내 인생에서 얼마나 더 남아있을까.


남은 시간을 생각하니,

이 시간들이 귀하고 귀하다.


쉬겠다고 누운 엄마 옆에서 엄마 손을 한참이고 만지작거렸다.

어느새 내 손보다 더 작아졌고 늙어서 노인의 손이 되어버린 나의 엄마의 손.


이렇게도 많은 주름의 손을 갖게 된 만큼

수많은 고통들이 있었다는 것을 엄마의 삶이 기억할 테지.


그리고 그 일부를 나도 기억하고 있다.


아무것도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나니,

엄마는 지금,  아기가 된 거나 다름없다 말씀하시며 한숨을 같이 내쉬었다.


허무함이 묻어나는 말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이 같이 한다는 걸 나는 안다.




처음으로 아파트 밖으로 엄마 손을 잡고 형부가 꾸며놓은 1층 화단의 꽃구경을 갔다.

매일 1층 베란다에서만 바라보단 풍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바닥에 있는 키가 작은 꽃들이

당신 걸음으로 걸어서 나와 보니 보인다며, 엄마는 아이 같은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이 꽃이 참 이뻤는데. 지금은 졌다잉~ "

"아따~저 꽃도 참 고왔는디 다 떨어져브렀네 지금은~ "


엄마의 얼굴을 보니, 당신 집을 떠나 언니 집 방 한 칸에서 침대 하나로 지내는 엄마는

오늘 어떤 일이, 엄마의 마음에 웃음을 줄 수 있을까. 적적하진 않을까. 

그동안 했던 나의 걱정들이

엄마의 함박웃음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엄마를 부축하며 산책하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어 엄마의 사진을 찍었다. 


"늙은 노인네 사진 찍어 뭣한다고 찍는다냐. 쓸데없이~"

말은 그렇게 하고서 잔머리를 쓰다듬는 엄마의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산책을 마치고 다시 엄마를 부축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베란다로 보이는 이 몇 평 안 되는 화단의 꽃들을 동무 삼아 엄마는 매일의 안부를 전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많은 자식들보다, 엄마의 시선에 두었던 꽃이 더 엄마의 마음에 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사람이 전하지 못하는 계절의 따뜻한 마음을 엄마가 꽃을 보며 받았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나도 엄마처럼, 

내 삶의 불편한 마음들까지 그저 수용하며, 오늘을 아끼며 잘 살아야 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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