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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오챠오 Jul 23. 2020

연희살이 2 - 연희이전, 스무 살

연희살이

* '연희살이'에는 정서적 폭력, 물리적 폭력, 자살, 그리고 정신과 상담이 묘사되어 있으니 트리거를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지금에 와 떠올리면 그 해엔 참 괴로운 일들이 많았다. 모두가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던 고등학교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겨우 벗어나 들어와 보니 대학은 쏟아지는 관념의 바다였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관념, 어젠다, 지향의 파도 앞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주었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피로했고,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매일매일 무언가 짜릿한 경험을 찾아 헤맸다. 그러한 갈망은 대부분 술로, 술자리로 채워졌고 자연스레 몸 상태도 나빠졌다.


 몸은 항상 물에 젖은 듯 무거웠고, 나 자신을 돌보는 일에 늘 무기력했다. 무력함과 가라앉는 기분을 매일 술로 때우니, 곧 술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당연히 학점은 개판이 났고 당장 나의 손에 결과가 잡히는 다른 활동들에 더 매달렸다. 그렇게 1년을 지내던 어느 날, 문득 내가 알맹이 없이 빈껍데기만 유지하며 하루하루 숨만 쉬며 살아가는, 추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살고 싶진 않았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 없이 사는 나에겐 학문을 하는 것은 의미 없었다. 잠시 휴학을 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지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보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휴학을 얘기했고, 내가 당신의 자식농사 계획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났음을 깨달은 아버지는 나를 두들겼다. 한참 맞다가 나는 너무 죽고 싶어 져서 자살 시도를 하려다 실패했다.     


  사실 아버지가 내 머리채를 잡고 거실 바닥에 내동댕이 치기 한 시간쯤 전에 나는 이미 거실에서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 거실 바닥에 누워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내려오는 먼지를 입으로 후후 불어내다 문득 죽고 싶어 졌다. 그 당시에 입버릇처럼 말하던 죽음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실행까지 해볼 의지가 생겼다. 부엌 찬장에서 도저히 용도를 모르겠는 묵직하고 멋진 칼을 찾아냈다. 편안한 자세로 거실 소파에 앉아 손목에 칼을 대어보았다. 칼은 묵직했지만 무뎠고, 손에 힘을 주어봤자 금속의 차가움만 느껴질 뿐이었다. 손목을 긋는 것은 그만두고 나는 무딘 칼을 손에 쥐며 집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내 머리가 바닥에 부딪혀 두개골이 산산조각이 난 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내 몸이 꿈틀거리며 겪을 고통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곧이어 부모님이 집에 돌아왔고, 나는 무딘 칼을 책상 서랍에 숨겼다.


  아버지에게 휴학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았잖아요. 사실 제가 이제껏 뭘 하며 산 건지 잘 모르겠어요. 힘들어요.' '다 너를 위해서 시킨 일이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해봤자 소용없다. 너는 너만 생각하고 너만 잘났느냐.' 그런 이야기를 하다 언성이 높아졌고 아버지는 내 뺨을 때렸다. 얼얼했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이전에 한 번도 아버지에게 매 없이 맞은 적이 없었다. 이런 ‘폭력’은 처음이었다. 뺨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두들겨 맞으면서도 이런 비이성적이고 짐승 같은 놈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을 거란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멍청하게도 계속 맞았고 아버지가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복부를 가격할 때쯤에야 나는 잘못했다는 소리를 했다. “살려주세요” 분명 내 입에서 나오는 걸 알면서도 이 소리가, 이 아픔이 마치 남의 것을 듣고 느끼는 듯했다. 아, 꼭 짐승의 멱따는 소리 같구나. 나는 아버지에게 계속 맞으며 살려달라고 빌었고, 엄마는 울부짖으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세 마리 짐승이 뒤엉켜서 짐승의 소리를 내었다. 나는 짐승의 삶을 살고 있구나. 순간, 이 아비규환 속에서 나 혼자 구경꾼이 된 기분이었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 삶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베란다로 뛰쳐나가 창문을 열어 난간으로 허겁지겁 올라갔고 그 집은 아파트 8층이었다. 엄마가 달려들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나는 죽지도 못하는 서러움에 비명 지르며 울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때리지는 않고 꿇어앉은 나에게 성을 내다 밖으로 나갔다.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하여 죽도록 맞았던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위로했지만 악에 받친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 몇 시간을 소리 지르고 울었다. 지쳐 누워 이불속에 웅크려 있는데 방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내 이불을 들추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지으려고 했고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들춰진 이불 너머로 포착한 아버지의 표정은 분명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나는 분노도 공포도 아닌 모멸감을 느꼈다. 저녁 시간 내내 나는 울면서 밥을 욱여넣었고 국은 너무 뜨거웠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울고 또 울었다. 잠이 들고 싶었지만 목에 걸린 응어리가 너무 아파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울다 결국 지쳐 잠들고, 나는 꿈을 꾸었다. 다정한 사람들이 내게 다정한 말과 행동을 하는 꿈이었다. 달콤한 꿈을 꾸고 난 후 일어나 현실을 마주하니 정말 지옥 같았다. 붙잡혔던 머리는 욱신거렸고 두통과 어지러움에 도저히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화장실에서 마주한 내 얼굴과 몸의 생채기들이 어제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잠에 들어 꿈을 꾸고 싶었다. 다정한 말들이 가득한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삶의 고통도 죽음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으면 좋겠다. 계속 누워있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수면제를 먹고 싶었다. 긴 잠에 들길 바랐다.     


  그다음 날 나는 머리를 새로 염색하고, 저녁에는 소개팅을 나갔다. 충동적으로 잡은 게 아닌 그저 전에 계획한 약속이기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시간에 맞춰 나갔을 뿐이었다.

     

  미용실에서 염색을 하는데 정말 우연히 염색약이 불량품이라 머리는 당근과 시금치 같은 기묘한 색이 되었다. 미용실 선생님은 계속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왠지 머리색이 맘에 들었다. 안 그래도 가기 싫은 소개팅이었는데 소개팅 상대에게 보자마자 채일 것 같은 꼴이었다. 사실 전혀 그럴 필요 없었는데 선생님은 미안하다며 머리를 아주 예쁘게 드라이해주었다. 눈가에 든 멍 때문에 화장을 진하게 해서 평소보다 차림새가 화려했는데 괴상한 색의 잘 세팅된 머리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어쩐지 이 상황들이 잘 짜인 한 편의 코미디 같아 유쾌했다.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소개팅에서 그냥 맛있는 밥이나 먹고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오늘 어쩌면 즐거운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소개팅 상대는 끔찍할 정도로 말솜씨가 없었고, 총체적으로 교제에 미숙한 사람이었으며, 그것을 모두 뛰어넘을만한 매력도 없었다. 상대의 무례할 정도로 솔직한 이야기들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음식에 집중하니 참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 나를 상대가 붙잡자 나는 당황스러웠다. 내겐 웃음이 나올 정도로 최악의 소개팅이었는데 상대는 정말 내가 맘에 든 건지 혹은 소개팅만 나오면 다 사귈 수 있다 믿은 건지 나와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날 약속을 잡으려 했고, 나는 그냥 얼버무렸다.     


 데려다 주려는 상대를 돌려보내고 친한 선배인 T를 불러 술을 마시며 하루 종일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푸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T는 내 손에 난 생채기를 보고 어디서 다쳤는지 물었다. 선뜻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어디 부딪혀서 생겼다’라고 했다. 아버지한테 맞았다. 날 때린 아버지가 웅크린 날 내려다보며 웃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T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날, 평소처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 평소처럼 웃으면서 T와 헤어졌다. 어제 있었던 일들은 그저 악몽이었던 것처럼 왠지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며칠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사람들을 만나며 지냈다.          


 집에서 엄마는 나를 억지로라도 식탁에 앉혀 매일 가족 모두가 모인 식사자리를 만들었다.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소리도 없이 울며 그냥 밥을 욱여넣었다. 내가 매번 우는 걸 알면서도 '식사자리'는 계속 마련되었고 며칠이 지나자 나는 입을 꾹 다물면 울지 않고 밥 정돈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외식하자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어느 고깃집에 갔다. 식사 내내 가족들 모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이런저런 얘기를 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내 맞은편에 앉았고, 나는 조용히 고기를 먹었다. 다행인 것은 그 집 고기가 참 맛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 숟가락 위에 고기를 얹으며 미안하단 말을 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목이 턱턱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이어지는 그동안의 나의 처신에 대한 아버지의 이런저런 충고들을 한참 듣고서야 나는 “네, 죄송합니다.”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엄마는 옆에서 다행이라는 듯 앞으로 잘하면 된다며 나를 격려했고, 나는 울음을 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땐 그냥 꼴 뵈기 싫었을 뿐, 그를 증오하진 않았지만, 그에게서 미안하단 말을 듣는다고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 집에서 맞았던 그날로부터 나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공간 자체가 나에게는 이미 폭력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던 어느 날,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눈물이 나왔다. 나는 이 집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구나. 이곳은 더 이상 나에게 집이 될 수가 없었다. 



 마침 연희동에서 살고 있던 친한 학교 선배 Z는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했고, 나는 Z에게 바로 들어가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겨울 두 달간 Z의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고, 엄마는 알겠다며 그 두 달이면 괜찮아져서 올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확답할 수 없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스무 살의 겨울, Z의 연희동 집에서 도피성 객살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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