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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오챠오 Jul 23. 2020

연희살이 1 - 연희이전, 나와 가족

연희살이

* '연희살이'에는 정서적 폭력, 물리적 폭력, 자살, 그리고 정신과 상담이 묘사되어 있으니 트리거를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무엇으로부터, 왜 도망쳤는가'에 대해선 연희동 주민이 되기 이전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는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 사정이 좋아질 즈음 태어나 꽤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자매들 덕분에 부모님은 아이를 공부하게 하는 법을 터득했기에 나 자체는 타고난 건 많지 않아도 어렸을 때부터 좋은 학업적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부모님의 시선에서 내가 세 딸 중에서 가장 '가방 줄이 길어질 가능성이 있는' 자식이었고 그 말인즉슨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자식으로 지목된 것이었다.


 따라서 아버지는 나에게 "안정적인 직장(공무원, 교사 등)을 얻어 시간적 여유를 가지는 자식이 자신의 노후를 함께하는" 본인의 꿈을 이뤄주길 강요했다. 때때로 내가 당신의 시나리오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날 기미를 보이면 항상 심한 체벌이 뒤따랐고 어머니는 그런 상황들을 "아버지가 나를 세 딸 중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아버지를 두둔했다. 실제로 세 딸 중 내가 가장 경제적 지원을 많이 받기도 했고 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가장 많이 보낸 자식이기도 했다. 어릴 때 친척 또는 주변 어른들이 내게 "네 아버지가 세 딸 중에서 널 제일 좋아하시는 것 같다."라고 말할 때 어린 나는 어리석게도 우쭐해지곤 했다. 생존 본능 때문인지 세뇌교육 때문인지 나는 아버지의 계획대로 “부모님에게 순종하며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소극적이지도 않으며 훗날 부모님을 부양할 가능성이 있는” 상당히 모순적인 인간으로 자랐고 한때는 나의 그런 모습이 꽤 맘에 들었다.


 집안의 '아들' 역할을 하며 밖에서 ‘여자아이’인 척하는 것은 상당히 괴로웠다. 청소년기의 몇 년 동안 나는 치마를 입는 것을 병적으로 거부했고, 또래 남자아이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격지심을 가졌다. '내가 좆 달린 채 태어났다면'으로 시작하는 상상과 푸념은 늘 자기혐오로 끝나곤 했다.


 나의 자기혐오를 모두 덮을 만큼 ‘아들’에게 주어지는 특혜는 달콤했다. 가족 식사에서 상석에 앉았으며, 아버지의 자식 자랑 맨 첫마디의 대상이었고, 뭐든 가장 좋은 것은 나의 차지였다. 결정적으로 나는 가족 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분풀이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자매들이 아버지의 발길질에 숨죽여 울 때 나는 매 없이는 맞아 본 적 없으며, 그마저도 오직 내가 아버지의 '계획'에서 벗어날 때뿐이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 특혜들이 모두 ‘내가 잘나고 부모님의 말을 잘 듣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려 두드려 맞는 자매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번듯한 ‘아들’로 자랐다.



 내가 중학생 때, 작은 언니는 부모님을 졸라서 비싼 값을 치르고 마두금이라는 악기를 사서 몽골 전통음악을 배웠는데, 몇 달 만에 그만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화난 적이 있었다.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버지는 작은 언니와 내가 자고 있던 방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작은언니의 배를 발로 가격하고 그 비싼 악기가 부러질 때까지 언니를 마두금으로 두들겨 팼다. 언니는 토악질을 하며 바닥을 기어가 아버지에게 싹싹 빌었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라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약자의 선상에서 빗겨 서있던 나는 아버지의 ‘폭력’이 그토록 공포스럽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마치 짐승과도 같이 만든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지금껏 폭력에서 벗어나 있던 이유는 단지 ‘말을 잘 듣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집안 내에서 나의 권력은 나의 '잘나고 특별함'이 아닌 '아버지의 아들 노릇'이라는 아주 연약하고 아슬아슬한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 기이한 폭력의 구조에서 가족 중 누구도 서로를 아버지로부터 보호할 수 없었다.


 지금은 집을 리모델링해서 이젠 흔적조차 없지만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내 부서진 방문의 구멍을 보며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증오심을 키웠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겨울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을 생각했다. 모두 잠든 새벽에 근처 강으로 가서 한참 동안 다리 아래 흐르는 새까만 강물을 내려다보곤 했지만, 뛰어내릴 용기는 없어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고등학교 때에는 그저 대학만 가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명문대에 입학하면 아버지의 ‘시나리오’를 벗어나도 아버지가 아무 말하지 못할 것이란 믿음 아래 나는 입시에 매달렸다. 아버지의 기대는 점점 더 커졌고, 나는 그만큼 더 아버지를 증오하며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스무 살이 되면 무언가 바뀔 것이라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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