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헤테로 연애 도전기
* 저는 돌 맞아 객사당하기 싫기 때문에 모든 인물의 실명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늘 그렇듯 관심과 애정에 목말라하는 나를 위해 친한 선배인 T가 내게 소개팅을 주선해주겠다 말했다. 평소 T는 자신이 남자 보는 눈이 까다롭다며 자부하곤 했는데 지인 중 가장 참한 남자를 골라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T는 몇 시간 동안 고민을 하더니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지인 중 아주 착하고 순종적인 남자라며 한 사람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는 매우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이었고 그의 외모가 맘에 쏙 든 나는 아주 신이 나서 T에게 강한 환영 의사를 표했다. 숫기가 없는 사람이라며 T가 내게 일러주었지만 나는 그런 점까지 아주 마음에 든다며 T를 들들 볶아 소개팅 날을 잡았고, T는 잔뜩 신이 난 나로부터 지인을 보호해야 한다며 보호자로서 함께 만나다 중간에 빠져주기로 약속했다.
소개팅 날이 되었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는 사진으로 보았던 것보다 조금 아담한 체형의 남자였지만 얼굴은 사진 그대로 정말 예쁘장했기에 나는 아주 연약하고 수줍은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을 연기하며 그의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T는 그런 나의 모습을 가증스러워했지만 나는 낯짝이 두꺼운 사람이기에 수줍은 척 흘끗흘끗 상대의 모습을 훔쳐보며 만족스러워했다.
셋은 맛집이라는 초밥집에 갔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이야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아주 좋은 예감이 든 나는 T에게 얼른 떠나라며 눈치를 주었고, T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곧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T가 떠나자 순식간에 테이블에 침묵이 덮쳤고 초밥을 씹어 넘기는 소리만 간신히 고요함을 끊어냈다. T의 말대로 그는 매우 숫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음~ 초밥 정말 맛있네요~"라고 다급히 사운드를 채워 넣었지만 숫기 없는 상대는 "네, 정말 그러네요." 하더니 웃으며 초밥을 마저 먹었다. 아까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무엇이었던가... 다시 생각해보니 아까의 대화는 T를 매개로 끊어지지 않을 수 있었고, T는 나름대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었다. 떠나버린 T를 다시 불러 테이블에 앉혀 두기엔 이미 늦었고 아주 난감했다.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연약하고 수줍은 헤테로 여성 연기를 집어치우고 나의 술자리 필살기인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자극적인 어휘를 가미한 원맨 토크쇼를 시작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다는 듯 주의 깊게 들었다. 휴 됐다, 이제 침묵의 늪에서 대화를 정상궤도로 올려놓았다고 판단한 나는 내 이야기를 마친 후 다시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멀뚱히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 적어도 "아 정말요?"나 "와 정말 신기하네요."라던가 대화에 대한 호응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상대는 그런 간단한 리액션조차 보이지 않았다.
술이 땡겼다. 테이블 위의 접시가 비어갈 즈음 나는 근처에 가보고 싶었던 술집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고, 상대는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랐다. 편안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술집에는 내가 좋아하는 자극적이고 도수가 높은 술들이 널려 있었지만 나는 분위기가 그 지경이 되어서도 연약한 여성 컨셉을 포기하지 못해 그 집의 시그니쳐 메뉴라는 꽃술을 시켰다.
초밥집에서의 원맨쇼에 이어서 어떻게든 상대에게서 리액션을 끌어내 보겠다는 오기가 생겨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최대한 쥐어짜 냈지만 상대는 그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말에 집중할 뿐 리액션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대화를 끌어내고자 소싯적 고등학생 때의 에피소드까지 꺼내 "이런 경험 있으셨어요?"라고 물었다. '후, 이 정도 주제라면 공감하며 상대도 본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라고 안심하기가 무섭게 그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저는 그런 경험이 없네요."라고 답했다. 그의 말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수줍은 여성을 연기하기 위해 화장으로 한껏 밀어 올린 속눈썹을 팔랑거려보았지만 그는 이 어색한 대화의 단절을 눈치채지 못한 듯 편안히 미소 지으며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유려한 언변은커녕 남과 이야기 주제로 공유할 경험조차 소유하지 않았다.
상대는 숫기도, 언변도, 리액션도, 대화 주제도, 심지어 눈치도 무소유한 사람이었다. 웬만한 침묵엔 눈 깜짝하지 않고 화려한 원맨쇼로 대응해왔던 나는 그가 강적임을 인정하고 그저 소개팅이 마무리될 순간을 초연히 기다렸다.
술조차 바닥을 드러내어 침묵을 뚫고 '이제 일어날까요?'라고 물으니 그는 일관성 있게 미소 지으며 순종적으로 수긍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라는 의례적인 말을 덧붙이며 지하철역에서 인사한 후 각자 제 갈길을 갔다. 집으로 가며 돌이켜보니 소개팅 이전에 번호 교환을 하지 않더라도 끝날 때 즈음엔 인연의 종결 혹은 애프터 신청을 위해 으레 번호교환을 하는 법인데 그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내 번호를 소유하지 않으며 내게 해맑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는 끝까지 무소유를 실천하는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내 취향의 외모라도 나는 대화에 관해서는 맥시멀리스트이기 때문에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하는 상대와는 절대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T의 남자 보는 눈에 대해 재고하여 다시는 T가 주선한 소개팅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여하튼 상대가 그의 소중한 신념을 지키면서 살아가기를 멀리서나마 빌어본다. 속세를 떠나 머리를 빡빡 깎은 그를 어느 산사에서 우연히 마주칠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