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
2003년생부터는 한국에서 혼동을 야기함을 이유로 빠른 년생(1, 2월 생이 1년 빠르게 초등학교를 입학함)을 제도적으로 금지했다. 2월생이라 학교를 1년 빨리 들어간 나는 어느새 밀레니엄 세대 이전 사회의 혼동을 야기하는 유물이 되어버렸다. 죽어버린 제도와 함께 옛날 사람이 된 기분을 한껏 느끼며 빠른 년생으로 살아온 삶의 희로애락을 짤막하게나마 기록하려 한다.
젊음이란 상대적이긴 하지만 같이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보다 한살이나마 어리다는 건 꽤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한 번도 누군가 명확히 정리해준 적 없지만 사회엔 '나이에 따른 할 일과 역할'이 존재한다. 명절 때 친척들이 둘러앉아 덕담을 빙자한 남의 자식 후려치기를 할 때 으레 '너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로 서두를 잡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앗~ 저는 빠른 년생이라서요~'라는 말로 아직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라는 듯 굴면 쉽게 대화를 빠져나갈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오랫동안 사용한 명절 대화 피하기 레퍼토리이다.)
빠른 년생이라는 점이 삶에 항상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가끔 또래들이 족보정리를 한다며 언니, 오빠라고 불러보라고 할 때가 있다. 어릴 땐 더 심했지만 성인 되어서도 여전히 그러는 인간들이 있다. 한 번은 나와 반대로 생일 때문에 늦게 학교를 들어간 대학 후배가 자신이 나보다 몇 달 빨리 태어난 것을 안 이후로 한동안 나에게 자신을 '오빠'라 부르라 했는데, 내가 한껏 콧소리를 섞어 '오빵~'을 말머리로 삼아 사회적으로 손아래 여성에게 요구되는 애교를 과장되게 형상화시키니 그 후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래, 오빠라고 불러."라고 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마주칠 때마다 그 짓을 하니 후배는 질색하며 다신 호칭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고질적인 나이 위계에 의해 생기는 짜증 나는 상황들 외에도 빠른 년생의 애환은 잔뜩 있다. 어릴 때 나에겐 풀지 못한 한이 있었는데, 내 생일은 항상 방학, 그것도 학년이 바뀔 때의 방학이라 성대하고 바글바글한 생일 세레모니를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도 내 생일이라며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내내 자랑하고 싶었지만 방학중 집에서 외치는 나의 생일 축하노래는 메아리와 돌림노래가 되지 못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되기 일쑤였다. 대학에 와서도 생일이 방학중이라 성대한 생일 파티를 하지 못했는데 결국 대학교 2학년 때 알바하던 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알바하며 내 생일이니 놀러 오라고 (하지만 값은 알아서 지불하라고) 공지한 후 여차 저차 하여 결국 바글바글한 생일파티에 대한 한풀이를 했다.
성인이 되어 가장 후회되고 한이 되는 것은 대학교 1학년 내내 대학가의 번쩍번쩍한 네온사인을 즐기지 못하고 민증 검사를 피해 학교 근처나 지금 생각하면 누가 가나 싶은 음침하고 깡소주만 파는 술집에 자주 들락거리며 불법을 일삼았던 것이다. 내 아까운 간을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맛있는 술들에 바치지 못하고 그깟 깡소주에 몰빵 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 매우 안타깝다.
하지만 빠른 년생이어서 즐거운 점도 있다. 나는 19살 땐 사회적 나이로 20살, 21살 땐 만 20살로 3년 동안 스무 살로 살았다. 3년간의 스무 살 이후로는 나이를 세어 본 적 없기 때문에 따라서 지금은 나이 든 스무 살이다. 친구들이 서른이 될 때 나는 또 사회적 나이로 30살, 31살 땐 만 30살일 테니 또 3년+a의 시간 동안 서른을 즐길 것이다.
빠른 년생 때문에 생기는 혼동은 1,2월 생의 탓이 아니다. 빠른 년생이라는 점으로 삶에서 많은 희로애락을 겪지만 빠른 년생 때문에 생기는 사회적 혼동은 그저 '족보정리'와 나이에 따른 역할에 집착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의 일면일 뿐, 학교를 일찍 들어가든, 늦게 들어가든 그건 기분 문제일 뿐이다. 여하튼 역사 속에 사라져 가는 제도를 품고 오늘도 빠른 년생들은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