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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오챠오 Sep 25. 2020

크리스마스 즈음의 악몽 - 나의 헤테로 연애 도전기 3

나의 헤테로 연애 도전기

* 저는 돌 맞아 객사당하기 싫기 때문에 모든 인물의 실명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나의 생애 첫 소개팅은 아직도 내 지인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이 헤테로 연애 도전기를 쓰는 계기가 된 소개팅이기도 하다. 그 소개팅은 내가 스무 살 때, 크리스마스 즈음의 일이었다. 


  친한 대학 동기 S가 1학년 1학기가 끝날 때 즈음 나에게 두 다리 건너의 소개팅을 제안했다. 소개팅 상대는 나와 동갑이고,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직한 사람인데, 상대 쪽 주선자의 말로는 아주 순박하고 착하고 여자를 못 만나본 '청정'한 남자라고 했다. 그 당시의 나는 (한참 술 처먹고 다니느라) 연애 생각도 없으면서 '음~ 소개팅~ 안 해봤는데~ 한번 해보지 뭐~' 이런 마음으로 수락했다. 그리고선 소개팅을 받은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해 가을 즈음 S가 나에게 급히 연락을 해왔다.


 '너 이 소개팅할 거야...?'


 아니 뭐 나도 까먹고 있긴 했는데, 주선해준다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싶어 '왜 그러냐, 나는 소개팅할 마음은 있다' 하니 S는 머뭇거리더니 소개팅 상대의 사진을 보겠냐고 물었다. 뭐 헤테로 소개팅에서 사진 교환이야 의례적인 일이니 알겠다고 내 사진도 보내도 괜찮다 말하고선 상대의 사진을 받았는데... 미추를 떠나 상대는 꽤나 노안이었다. 술집에서 찍은 듯한 사진이었는데, 그의 앞에 놓인 맥주잔이 위스키잔로 보이는 착시를 일으킬 정도의 노안이었다. 사진을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여러 차례 나와 동갑이 맞는지 S에게 묻자 '스무 살 맞대...ㅠㅠ 싫으면 안 해도 괜찮아'라며 매우 미안해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연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경험상 해보면 좋지'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소개팅을 받은 거라 '괜찮아 소개팅은 그냥 할게, 소개팅 날짜만 주선자들 통해서 잡고 그 직전까지 연락처는 절대 주지 말아'라고 말한 것이 사건의 단초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대학 밖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고, '어쩌면 사진빨을 못 받는 사람일지도 몰라!' 하는 매우 낙관적인 생각과 함께 어쩐지 빠른 시일 내에 만나고 싶지는 않은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전 월요일로 날을 잡고 또 그 소개팅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쏜살같이 시간은 흘러 크리스마스 즈음이 다가왔고, S는 비장하게 상대에게 내 번호를 넘겼음을 알렸다. 나는 이미 '재밌는 사람이라 맛있는 것 먹으면서 재밌는 얘기 했음 좋겠네~'라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상대의 연락을 기다렸다. 상대의 간단한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언제, 어디서 만날지 꽤나 순조롭게 대화가 흘러갔다. 상대가 내게 "일본 음식 좋아하세요?"라고 묻길래, '아, 그래도 뭔가 미리 소개팅 장소를 알아봤나 보네. 의례적이지만 매너는 있군.' 하는 생각으로 "저는 뭐든 잘 먹어서 일본음식도 좋아요!ㅎㅎ"라고 보냈다. 그렇게 시간, 장소, 식사메뉴까지 정한 후엔 연락이 이어지지 않아 나는 마음 편히 맛있는 일본음식을 떠올리며 소개팅 날을 기다렸다.


 소개팅 당일, 약속된 시간 전에 초록색으로 머리를 염색하려 미용실에 갔는데(미용실 예약일은 절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염색약이 불량이라 굉장히 괴상망측한 그라데이션 염색이 되었다. 머리 뿌리에서부터 흙색, 주황색, 초록색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흙당근 머리였다. 미용실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미용실 전체 스탭이 내 머리를 둘러싸고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토론을 시작했다. 결국 원장님과 스탭 3명이 내 머리에 달라붙어 염색을 한번 더 덧씌워 보았지만 그 화려한 그라데이션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쯤 되니, '아 오늘 소개팅은 운명적으로 망할 조짐이 보이는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체념하니 머리색이 아주 독특해서 소개팅 상대가 보고 도망갈 것 같다는 점에서 매우 맘에 들었다. 미용실 원장님은 미안한 표정으로 '요즘 투톤 염색이 유행이긴 한데...' 하시며 머리를 예쁘게 드라이해주셨지만, 결과물은 어쨌든 예쁘고 화려한 흙당근이었다. 진심 어린 사과와 무상 A/S를 약속하시며 원장님은 끝까지 속상해하셨지만, 나는 '야호! 오늘 소개팅 백퍼 금방 쫑난다!'라는 생각에 소개팅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매우 가벼워졌다.


 상대가 신촌역 3번 출구에서 기다린다는 연락을 받고 출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데,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나는 홀린 듯이 상대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사진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쩌면 재밌는 사람일지도 몰라! 오늘 맛있는 걸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야!'라며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그런 노력을 만난 지 단 4분 만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인사와 함께 신촌 거리를 걸으며 4분 동안 그와 대화하면서 느낀 그의 인상은 '쓸데없이 말이 많고, 모든 말이 하나같이 재미없고, 말이 유려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말의 기대감조차 박살난 나는 맛있는 음식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그래 네놈이 찾아낸 맛집이 어딘지 보자'하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어디로 갈지 물었다. 그는 "제가 신촌 지리를 잘 몰라서요." 하며 오히려 내가 다니는 대학 근처인데 왜 신촌 맛집을 모르냐며 의아해했다. 1년간 학교 다니면서 술집이나 쏘다녔지 맛집이라곤 학교 근처 인도 카레집 밖에 모르던 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나는 배고팠고, 상대에 대한 기대감은 없으니 무조건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는 집념 하에 머리를 쥐어짜 냈다.


두뇌풀가동


 '맞아! 몇 달 전 동기와 갔던 신촌 일본 라멘집이 맛집이다! 소개팅에 라멘은 부적절한 것 같지만 뭐 어때, 맛있으면 된 거지!'라는 생각으로 라멘을 제안했고 상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그 집은 굉장히 유명한 맛집이어서 웨이팅이 꽤 길었는데, 날이 추웠기에 나는 얼른 가게 앞 난로 앞에 서서 손바닥을 비볐다. 상대는 잠시 어물거리더니 내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의아했지만 상대가 앉아있고 싶은데 자기 혼자 앉기 민망해서 그러려니 하고 자리에 앉아 상대에게도 옆의 빈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상대는 한사코 자리에 앉기를 거부하며 내 앞에 서 있었다.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앉고 싶은 것도 아닌데 왜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던 사람을 불러다 앉히는 거지? 나는 매우 당황했고 한순간 '이 사람 설마 초록창 지식사람에 소개팅 성공하는 법 이딴 걸 검색해보고 와서 같잖은 매너를 부리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과한 추측인 것 같아 재빨리 불쾌한 상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여하튼 앉아서 상대와 대화를 하는데,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니... 더욱... 추남이었다.


 상대는 나의 혼란스러운 시선처리를 눈치채지 못하고 아주 신나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이 아주 가관이었다. 상대는 소개팅 전 내가 궁금하여 페이스북에 내 이름을 쳐서 내 sns를 쭉 둘러보다 본인이 흥미로웠던 지점들을 이야기했고(본인이 내게 직접 이야기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궁금해 소개팅 약속 몇 시간 전 홀로 학교 탐방을 했다며 내게 자랑했다. 아니 뭐 내가 궁금해서 sns를 염탐해 보고, 학교도 구경할 수는 있는데 그걸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는 상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 예... 그렇군요..."뿐이었다. 주제는 당시 상대가 재미있게 하는 게임 얘기로 넘어갔는데 (나는 당시에도 지금도 게임을 잘 모른다...) 상대는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사실 오늘 소개팅 장소를 제가 알아봤어야 했는데, 제가 어제 늦게까지 게임을 하느라 못 찾아봤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시점에서 결론지었다. '아, 이 사람도 내가 맘에 안 들어서 소개팅을 빨리 쫑내고 싶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놓고 자신의 밑바닥을 드러낼 리 없다.' 나는 그 날의 화려한 흙당근을 만들어주신 미용실 원장님께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보냈다.


야호 칼퇴의 영광을 원장님께


 상대도 내게 마음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마음이 편해졌다. 기나긴 웨이팅도 끝났겠다, 라멘을 허겁지겁 먹어치워줄 마음의 준비가 된 나는 자리에 앉아 빠르게 메뉴를 고르고 편안히 뜨신 물을 들이켰다. 상대는 내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테이블에 곧 도착할 라멘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신나게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덧붙여가며 원맨토크쇼를 선보였다. 드디어 라멘이 도착했고, 나는 라멘에 집중했다. 그 집의 라멘 국물은 고기육수를 쓰면서 신묘하게도 시원하고 깊은 맛을 냈는데, 뜨뜻한 라멘 국물에 아삭하게 씹히는 숙주와 적절히 졸여진 차슈가 감칠맛을 더하며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이 아주 일품이었다. 라멘 맛을 음미하며 숙주를 추가시킬까 고민하고 있는데, 상대가 머뭇거리더니 내게 물었다. "우리 동갑인데 말 놓을까요?" 나는 재빨리 "아니요, 전 존댓말이 편해서요ㅎㅎ"라고 대답한 후 면을 한 젓갈 더 집었는데, 상대는 내게 "제가 너무 재미없죠...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순간 라멘 맛이 뚝 떨어졌다. 아니, 대화가 재미없던 걸 본인도 눈치챘단 말야? 그 날 최고의 반전이었다. 풀 죽은 상대의 표정에 어쩐지 미안해진 나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라고 서둘러 수습해보려 했지만 내가 괜찮다 할수록 상대의 표정은 더욱 시무룩 해졌다... 나는 상대를 달래기 위해 열심히 원맨 토크쇼를 이어나갔지만 상대는 계속 자신이 재미없어 미안하다며 내게 사과를 했다. 한껏 숙연해진 분위기에 라멘에 집중할 수도 없고... 술이 땡겼다. 


 그릇이 비어 가는 것을 보며 '긴 하루였다... 오늘은 집에 일찍 가서 자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내게 "다 먹고 어디 갈까요? 카페? 아니면 영화 좋아하신댔으니 영화 보러 갈까요?"라고 물었다. 그 날 최고의 반전 갱신이었다. 세상에... 이 분위기에서 2차를 갈 생각이 든단 말이야...? 나는 당황해서 눈이 데룩데룩 굴러가는 걸 멈추지 못하고 약 30초간 상대의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했다. "... 아! 제가 원래 오늘 술 약속이 있었는데, 소개팅 간다고 빠져나왔거든요... 거길 가봐야 할 것 같아요."라는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도 상대는 쉽게 "그렇군요, 괜찮아요ㅎㅎ"라며 수긍했다. 정말 착하긴 착한 사람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이번 식사를 담보로 다음 약속을 잡을까 두려워 더치페이를 하려는 나와 꿋꿋이 자신이 모두 계산하겠다는 상대 사이에 치열한 기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상대가 전부 결제하고 말았다...


 상대는 내게 술자리까지 데려다주겠다 했지만, 나는 학교에 잠시 들러야 한다며 괜찮다 했고, 그 주제로 설전을 벌이다 결국 학교 정문까지 같이 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정말 피곤하고 술이 땡겼다... 이 사람 분명 초록창에 소개팅 성공법 검색해보고 온 것이 틀림없다는 추측에 신빙성이 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화려한 흙당근이 너무 꼴뵈기 싫어서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닌가 하는 피해망상까지 들었다. 피곤해서 더 이상 말할 기운도 나지 않아 아무 말 없이 걷는 중에 상대는 내게 물었다. "이번 주 크리스마스이브에 뭐하세요?" 그 날 최고의 반전_진짜_최종 갱신이었다. 나는 1초도 안되어 "아 제가 24, 25, 26일 모두 가족여행을 가서요ㅎㅎ"라는 거짓말을 쥐어짜 냈다. 그 해 내가 발휘했던 최고의 순발력이었다. 상대는 티 나게 시무룩해지며 "아... 저는 올해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냥 출근해서 일해야겠네요..."라고 말했다. 그쯤 되자 상대가 시무룩해지든 말든 나는 아주 피곤했고 술이 아주 땡겨서, "열심히 일하세요ㅎㅎ"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드디어, 학교 정문에 다다라 한사코 학교 안 까지 들어오려는 상대를 돌려보냈다. 상대는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며 연락하겠다 말했고 나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하며 후다닥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잠시 학교 벤치에 드러누워서 친한 선배에게 당장 술 마시러 나오라고 연락했다. 진동음에 놀라 벌떡 일어났더니 상대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ㅎㅎ 다음엔 더 맛있는 것 사드릴게요 오늘 술자리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야 이놈아 너만 즐거우면 다냐 나는 재미없는 네놈 꼬락서니 다시 볼 생각 추호도 없다!'라고 답장을 보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 '네~ 저도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은 봐요~'라는 온건한 거절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 



 친한 선배와 만나 소주를 목구녕에 부으며 그 날의 파란만장함을 늘어놓으니 아주 살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상대에게 '이제 술자리 들어가셨나요?'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ㅠㅠ' '아직 집에 안 들어가셨나요?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댓 통의 문자가 왔고 나는 '염병할 놈 소개팅 한번 했다고 내가 지 애인인 줄 아네'하며 문자도 씹고 상대도 씹었다. 선배와 나는 초록창에 '소개팅 필승법'따위를 검색해보며 상대가 소개팅 전 대체 어떤 되도 않는 글을 보고 그랬던 것인지 토론했다. 


 그 날 라멘 값 두 배의 술값을 치른 후 다음날 아침 숙취에 쩔어 학교에 가는데, 또 상대에게 문자가 왔다. '어제 잘 들어가셨나요? 답장이 없어 걱정되네요ㅠㅠ' 나는 속으로 '아~예~ 어제 술 먹고 저는 뒤졌습니다~ 뒤진 사람은 답장 못 합니다~' 하며 그 문자까지 씹었고, 더이상 상대에게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크리스마스 즈음의 악몽 같은 하루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두 달 후 누군가에게 '뭐해?'라는 문자가 왔고, 확인해보니 그 소개팅 상대였다... 아직도 반전이, 크리스마스 즈음의 악몽이 끝나지 않은 것인가... 나는 조금 소름 돋았지만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느 스릴러 영화가 그렇듯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다시 두 달 후, 다시 상대에게서 '뭐해?'라고 문자가 왔다. 소름이 돋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그래, 진정한 서스펜스는 관객이 방심할 때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지... 그의 집념이 만들어 낸 서스펜스에 감격하며 그를 차단했다. 


 매 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그 악몽 같던 하루가 한 번씩 떠오른다. 코미디인 줄 알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마지막까지 완벽한 스릴러의 정수를 보여준 상대에게 찬사를 보내며 그가 올해 크리스마스도 즐겁게 보내길 바란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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