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희극
몇 년 전 룸메이트 Z와 살던 때의 일이다.
그 당시 Z와 나는 매일 누워서 아름답고 평화로운 남의 집 고양이 유튜브 영상을 보며 고양이의 귀여움에 대한 찬미와 함께 '나만고양이없어' 하며 상대적 박탈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느 날 Z의 지인이 가족여행을 가며 본인 집 고양이를 며칠간 임보 할 집을 구했는데, Z는 주저 없이 남의 집 고양이님의 임시 집사가 될 것을 자원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을 정리하며 Z와 나는 '뭘 좋아하실까, 뭘 필요로 하실까'하며 손님맞이를 준비했다. 드디어 도착하신 손님이 케이지 밖으로 발을 뻗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밤하늘처럼 새까맣고 반짝이는 작은 손님은 상당히 귀엽고 낯을 가리질 않았다.(사실 Z와 나를 없는 존재 취급하셨다...) 집 안을 한참 기웃거리시더니 창가가 맘에 드는 듯 창가에 자리를 잡아 종일 지나가는 차와 날아가는 새를 구경하셨다. 손님이 오신 첫날, Z와 나는 손님의 영역 구경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 다녔다.
그 손님의 데일리 루틴을 이러했다. 밥을 먹고, 창 밖을 구경하다, 집안을 헤집고 다니다가, 배변활동을 하고, 다시 밥을 먹는다. 손님께선 가끔 높은 천장에 기어 올라간 후 빠져나오지 못해 크게 울며 도움을 요청하셨는데 제때 구조하지 않으면 원망의 눈길을 받았다. 또 손님께선 낮밤을 모르시는 분이었는데 밤에는 제 집처럼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다. 잠귀가 밝은 나는 결국 잠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이 지쳐 주무실 때까지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곤 했다. 생활리듬이 깨져도 어쩌겠는가,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움을 내뿜는 손님 덕분에 Z와 나는 무릉도원을 느끼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Z와 나는 손님의 귀여움에 정복당해 고양님들이 환장하기로 유명한 츄르를 사고, 집에 있는 셀카봉과 신발끈으로 허접한 낚싯대도 만들며 손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손님의 마음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님은 가까이 다가가면 재빨리 다른 곳으로 도망가셨고, 잠시 곁을 내주는가 하면 인간들 따위에게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쌩하니 가버리셨다.
천고의 노력 끝에 우리는 손님과 친해질 수 있었는데, 이 손님은 친해진 후로는 잠자는 Z와 나의 배를 밟고 다니시고 겨드랑이 사이에 파고들어 오시거나 머리맡에서 빤히 지켜보시곤 했다. 손님이 친밀감을 드러내신 이후로 Z와 나는 손님께서 드러내시는 서비스 만족도를 경쟁적으로 자랑하곤 했다. '오늘은 내 머리 냄새를 맡고 가셨어!', '오늘은 내게 골골송을 들려주셨어!', '오늘은 나를 꼬리로 때려주셨어!', '오늘은 나를 침대로 쓰셔서 숨을 아주 조심스럽게 쉬고 있어!' 등 광신도적인 카톡을 주고받으며 Z와 나의 카톡창은 손님의 이야기로 가득 찼다.
그러던 어느 날, Z의 생일 저녁이었다. 잠시 외출했던 내게 Z가 갑자기 구조요청을 보내왔다. 손님의 프라이빗 배변 장소에서 냄새가 나서 Z가 배설물을 삽으로 퍼서 변기에 버렸는데(고영님들은 냄새나는 걸 싫어한다는 소리를 듣고 전에도 몇 번 버린 적 있었다.) 손님께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를 듣더니 헤까닥 돌변하여 할퀴고 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고 그리 순한 손님께서 성질을 부리면 얼마나 부리겠어 내가 사랑으로 보듬어 드려야지'하며 집으로 얼른 달려갔다. 그러나 사태는 이미 심각했다. Z는 현관에 쭈그려 앉아 집 안에 발들이지 못하고 있었고, 손님은 조금만 움직이면 그르렁 거리며 바로 날카로운 시선으로 Z와 나를 쳐다보았다. 사상초유의 사태에 주변의 고양이 준전문가들에게 연락해 상담하니 이유를 모르겠다며 다들 맛있는 간식을 드리며 안정시키라는 말 뿐이었다. 고정하세요 손님... 하며 츄르와 여러 가지 간식으로 회유해보려 했으나 이미 심기가 잔뜩 불편해진 손님께선 간식만 쏙 빼먹고 다시 그르렁거리셨다. Z와 나는 벌벌 떨며 고양이를 편안하게 하는 클래식, 고양이를 잠재우는 자장가 이런 유튜브 영상을 들려드렸지만 손님께선 여전히 진정되지 않으셨는지 발톱을 세우며 하악질 하셨다. 약 2시간 동안 손님과의 대치 후에야 겨우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장 잘 곳이 없던 우리는 신촌의 어느 모텔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Z는 자신의 생일날 고양이에게 영역싸움을 져서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여자 둘이서 모텔에 들어가는 그날의 상황을 어이없어했다.(참고로 Z는 뼛속까지 헤테로이다.) 여하튼 모텔에 방을 잡고 들어가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려는데, 옆 방 커플의 적나라한 사생활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영 듣고 싶지 않은 소음에 얼른 이어폰을 끼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음악을 들으며 잠에 든 나와 달리, 급히 나오느라 이어폰도 귀마개도 챙겨 오지 못한 Z는 밤새도록 이어지는 옆 방의 열띤 사랑나누기에 잠을 설쳤다고 한다.
다음날 Z와 나는 근처 지인의 자취방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뚱아리를 잠시 뉘이며 정돈했고, 동물병원에 들러 고양님들이 좋아라 하신다는 캣닢을 사서 다시 한번 회유하기 위해 빼앗긴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여전히 손님께선 화가 풀리지 않으셔서 현관문 안으로 손을 뻗어 캣닢을 이리저리 휘날려 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Z와 나는 우리의 보금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지인의 자취방에서 밤을 보냈다. Z는 여행 간 본래 집사에게 상황을 전달했고, 그분은 미안하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줄 선물을 하나씩 늘려나갔다.
집을 손님에게 점령당한 지 사흘째, 드디어 본래 집사가 케이지와 잔뜩 미안한 얼굴, 그리고 Z와 나에게 줄 바리바리 싸든 선물 보따리를 들고 돌아왔다. 문을 열기 전, 세 명의 인간 사이에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나 맥 빠지게도 본래 집사를 보자 손님께선 그에게 잔뜩 얼굴을 부비고선 케이지 안으로 쏙 들어가셨다. 정말 황당했다. 손님의 심정에 대해선 그저 '떼잉~쯧, 내 집 같지가 않다!' 정도로만 추측할 뿐, 왜 심기가 불편해지셨는지 아직까지도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우리에게 폭풍 같은 삼 일을 선사한 손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Z와 나는 캣닢과 사료와 손님의 털이 이리저리 흩날려 쑥대밭이 된 집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Z의 생일을 맞아 유명한 떡집에서 사 온 흑임자 인절미는 싱크대 위에서 이미 곰팡이 밭이 된 후였다.
이후 몇 주동안 Z와 나 사이에선 고양이 얘기를 꺼내는 것, 그리고 고양이 사진과 영상을 보는 것도 암묵적인 금기가 되었다. 내가 후에 또 남의 집 고양이 영상을 보며 고영님을 모시자고 조르자 Z는 다시는 이 집에 고양이를 들이지 않을 거라며 딱 잘라 기각했다. Z는 '우리 집 고양이'는 생각 말고 남의 집 고양이 영상으로 만족하라며 일갈했다. 나는 집 안 구석구석 남아있는 손님의 털을 발견할 때마다 그저 눈물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최고다. 나는 그들의 귀여움으로 세상을 지배해야 세계평화가 온다는 굳은 믿음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 언젠가 묘연이 닿는다면 고영님을 성심성의껏 모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