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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오챠오 Jul 25. 2020

아부의 기술 - 나의 헤테로 연애 도전기 2

나의 헤테로 연애 도전기

* 저는 돌 맞아 객사당하기 싫기 때문에 모든 인물의 실명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나는 아부에는 기술이 필요하고, 아부쟁이도 급이 나뉜다고 생각한다. 

 그저 마구잡이로 칭찬을 퍼붓는 자는 삼류이다. 타이밍을 잘 맞추어 칭찬을 하는 자는 이류이다. 질문 세례를 퍼부은 후, 자세한 근거를 붙여 칭찬을 하는 자가 일류이다. 


 아래는 내가 어느 소개팅 어플에서 일류 아부쟁이를 만난 이야기이다.


 몇 달 전 코로나 때문에 사람도 못 만나고 아주 심심하던 차에 인터넷에서 신개념(지들 말로는) 소개팅 어플 광고를 보았다. 보통의 소개팅 어플은 각자의 얼굴 사진을 드러내어 놓고 공작새처럼 자신의 외모를 뽐내며 짝짓기를 위한 치열한 눈치게임을 하곤 하는데, 그 어플은 얼굴 사진 대신 자세한 자기소개(=자기 자랑)를 뽐내며 가치관 테스트를 통해 매칭을 시켰다. 뭐 새로운 방식, 새로운 수식어를 붙이며 점잖은 척 해도 모든 소개팅 어플의 본질이란 짝짓기 건만... 여하튼, 그러한 새로운 방식의 소개팅 어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치열하게 자신들을 뽐내는지 궁금해진 나는 난생처음 소개팅 어플을 깔아보았다.


 대놓고 '저 술 담배 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같잖게 거짓말하는 사람은 죽도록 싫습니다'라는 식으로 내 소개를 대충 써서 낸 후 다른 이들의 자기소개를 구경했는데,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로 나 같은 '성별 상관없이 예쁜 것 좋아' 인간들을 배려하지 않는 헤테로 매칭 시스템 덕분에 주구장창 남성들의 자기소개만 봐야 했다.(특히 공대생 혹은 공대 출신이 많았다) 또 다른 문제는 내 기대와 달리 다들 자기소개에 창의성과 독창성이 없었고, 꽤나 시시했다... 다들 왜 그렇게 인생이 드라마틱하질 못하고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요ㅎ', '일상을 공유하며 제 옆에 있어주면 좋겠네요ㅎ'라는데 지 인생에 재미라도 있어야지 남과 즐겁게 일상을 공유하고 말고 할 것 아닌가... 취향도 어쩜 일남 문학의 대표 격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들 인상 깊게 읽으셨는지... 심지어 힙합은 좋아하는데 락을 싫어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락을 싫어한다니 말도 안 돼!!!!!



 그렇게 대화는 안 하고 수많은 비슷비슷한 자기소개에 평점을 매기는 것도 지루해질 즈음, 내게 대화 신청을 건 누군가의 자기소개가 내 눈길을 끌었다. 일단 영감을 받은 책에 무라카미 하루키를 적지 않았고, 단순하게 직업과 장래희망 소개가 아닌 현재 자신이 하는 일을 미래에 자신이 되고 싶은 인간상과 연결시켜 소개했고, 자신의 취미에 대한 자세한 예시와 최근의 경향까지 완벽한 브리핑이었다.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대놓고 써놓은 점에서 가산점까지 붙었다. 자기소개 뽐내기 대결에서 나는 그에게 깔끔히 패배를 인정했다. 


 나는 그와의 대화를 수락했고, 그와의 대화는 여러 가지 주제로 뻗어나가면서도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이 사람, 나 만큼이나 입 터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교통체증 없는 고속도로에서 달리는 듯한 대화의 템포에 나는 오랜만에 전장에 나선 장수처럼 아주 즐거운 긴장감에 빠졌다. 카톡으로 거의 밤을 새 가며 끝없이 대화했는데, 그는 놀랍게도 내가 스스로 자랑하고 싶어 하는 지점들을 쏙쏙 골라 근거를 붙여가며 칭찬했다. 매우 만족스러운 아부였다.


 언젠가 그가 내게 본인이 쓴 글을 보여주겠다 해서 순간 '헉 알고 보니 례술남?' 했지만 다행히도 예술·문화 비평 기사였다. 그의 글들은 자극적이진 않지만 최대한 아는 척을 자제하며 누구나 읽기 쉽게 쓰였다. 다소 재미는 떨어지지만 내가 꽤 좋아하는 방식의 글이었기 때문에 내 생각 그대로 자세히 칭찬했다. 그는 나의 자세한 평을 기뻐했고 글에 대해 이야기를 더 자주 나누었다. '어머, 이번에는 정말 헤테로 연애에 성공할지도 몰라!'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사실 연애감정을 느끼기보다는 그가 내게 아부를 하는 방식이 일류였고, 나는 관심에 목마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세련된 칭찬을 주고받는 것이 즐거웠다.


  딴소리지만, 나는 둔둔한 고양이 이모티콘을 아주 좋아하고 자주 쓴다. 어느 순간부터 그가 나와의 대화에서 내가 쓰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내 쓰는 걸 보고 따라 산 것 같은데 귀여운 고양이는 카톡창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딱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단지 '쯧, 이모티콘에 자기 소신이 없는 사람이로군'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튼 그와 한참 대화하던 즈음은 21대 총선 즈음이었는데, 왜 황교안은 삭발을 하고 안철수는 마라톤을 했는가, 그리고 홍준표는 어떻게 복당을 시도할 것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그는 꽤나 정치에 빠삭하고 위트 있게 정치인을 조롱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매우 즐거웠다. 다음 총선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에 페미니즘 이슈가 나와 내가 일장연설을 했는데, 그는 중간중간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며 맞장구를 쳤고, 마지막엔 덕분에 많이 배웠다고 덧붙이며 완벽한 일류의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내게) 즐거운 대화를 하던 도중, 그가 자신이 민주당 당원임을 밝혔다. 민주당 당원이라니... 왜 하고 많은 정당 중에 재미없게 민주당이란 말인가... 국가혁명배당금당이라면 차라리 매우 흥미로웠을 텐데 말이다. 그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진 나는 더 이상 그와의 대화가 즐겁지 않아 슬슬 뜸하게 답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즐겁게 하는 일류 아부쟁이였지만, 안타깝게도 재미없는 기득권 정당의 당원이었기 때문에 나는 눈물을 머금지는 않고 여하튼 아쉬움과 시시함을 동시에 느꼈다.



싫지만 흥미롭다

 


 내가 생각해도 성의 없는 칭찬을 마지막으로 그 일류 아부쟁이와 연락을 끊으며 소개팅 어플을 삭제했다. 그가 언젠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그 고양이 이모티콘은 매우 귀여워서 공익에 이바지하니 소신껏 많이 사용하길 바란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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