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구글링 탐험기
시작은 꿈이었다.
어느 날 새벽, 꿈속에서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정처 없이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을 훑다가 어느 도르래가 달린 책장을 밀어보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카피한 듯 '베뭐시기의 슬픔'이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밋밋한 책들 사이에서 책등에까지 금박이 박혀있는 화려하고 두툼한 양장본 책이 대체 뭔 내용의 소설인지 궁금했고, 서문을 읽어보니 소설이 아니라 전기 형태의 에세이였다. 에세이인데 제목을 뭐시기 슬픔 따위로 짓는 게 웃겨서 슥슥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안에서 책갈피가 뚝 떨어졌다. 그 책갈피는 압화가 같이 코팅된 촌스럽고 귀여운 책갈피였고 그 책갈피를 줍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꿈의 내용은 차치하고 실제로 그 도서관에 도르래가 달린 책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누운 자리에서 '갓 대학 입학했을 땐 도서관에서 이해도 못하면서 어려워 보이는 책만 집어 읽었더랬지~' 같은 생각으로 흘러 그 당시 읽었던 책들의 제목을 되짚어 보다가 문득 내가 신입생 시절 잔뜩 빠져있었던 어느 전공 교수의 책이 떠올랐다.
그는 수업을 열 때마다 대규모의 수강생을 끌어들이는 그야말로 스타 교수였고, 외부 강연도 많이 다니며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았다. 몇몇 전공 선배들이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와중에도 모두가 그의 대단한 학문적 업적을 인정했고 그의 수업은 다른 수업들과 다르게 재밌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의 열성적인 신봉자들은 본인 전공이 아니어도 그의 수업 어디든 따라갔기 때문에 항상 그의 수업은 경쟁률이 치열했다.
나는 운 좋게도 신입생 첫 학기에 그 치열함을 뚫고 그의 교양 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는데, 그의 언행들은 캠퍼스에 걸어 다니는 그 어떤 교수보다도 기이했고, 빔이 나오는 듯 한 안광에, 자기 생각나는 대로 내뱉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하나의 결론으로 도달하는 독창적인 수업방식을 보며 저 사람은 미쳤거나 어느 경지에 도달했거나 둘 중 하나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그런 모습이 필요에 의한 일종의 컨셉질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릴 때부터 '안광 무시무시하고 성공한 노인'을 동경해왔기 때문에 그의 말들에 쉽게 감명받았다. 나는 도서관에서 베스트셀러이자 수업 교재인 그의 책을 정독했고 중간시험은 수업이 아니라 책 내용을 알면 수월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들이 나왔기에 쉽게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기말은 에세이 형식이라 의미가 없었다)
그 다다음 학기에 그의 전공 수업을 신청했고 그는 교양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책을 교재로 골랐다. 단지... 교양 수업 교재였던 책과 달리 두터운 양장본이자 무진장 비싼 책이었고, 교양 때 그의 책에서 시험 문제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며 눈물을 머금고 지갑을 열었다. 언젠가 지나는 말로 선배들이 책팔이 교수라며 욕했던 게 그제야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수업은 만족스러웠고, 그다음 학기에 또 그의 책을(마찬가지로 비쌌다) 교재로 쓰는 전공을 들을 때쯤에야 매번 새로운 주제를 가져와 독창적으로 끌고 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수업 대부분이 거의 외워서 읊는 수준으로 그가 쓴 책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왠지 김이 팍 샜지만 그의 책 또한 그의 수업만큼 흡입력 있었기에 전과 같은 열성적임은 없어도 열심히 수업을 듣고 그의 책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퇴직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의 퇴직의 이유가 정치권에 발 한 번 들이려다 지저분하게 정치사건에 휘말려서라는 카더라가 학교에 돌았고 나는 왠지 모를 배신감과 충격에 단지 소문이란 걸 알면서도 그를 욕하고 깎아내렸다. 그가 퇴직해서 대학생들이 수업에서 책을 사지 않아도 여전히 그의 책은 잘 팔렸고, 그는 돈 많이 쓰는 재단과 함께 무료 강연 프로그램을 하며 지낸다는 근황이 근근이 들렸다. 그를 과 친구들과 가끔 안주거리로 씹다가 그에 대한 기억은 무의식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꿈을 계기로 오랜만에 그의 책과 그의 수업을 떠올린 나는 잔뜩 추억보정에 휘말려 '지나가는 말로 내가 그 교수를 너무 평가절하했나... 그래도 수업은 진짜 좋았지.'라는 생각에 요즘 교수님은 뭐하고 지내시나~ 계속 거기서 강연하시나~ 하며 그의 이름을 구글링했고, 그가 정치권에서 활기차게 활동 중이라는 기사를 단박에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이제 강연은 안 하시는 건가? 그가 했던 강연 프로그램을 다시 구글링 하던 중 프로그램에 대해 홍보하는 홈페이지 소개글의 단어 선택들이 배배 꼬이고 현학적이다라는 생각에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고 대체 뭐하는 프로그램인지 궁금해진 나는 이리저리 구글링했고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 하도 돈 많이 퍼주는 재단이랑 강연 프로그램한다고 소문이 나길래 어디 돈 많은 기업 재단인가 했더니 굉장히 소규모의 기업이었고 돈을 많이 벌기 어려운 업종이라 재단 이사장이 원래 금수저 물고 태어났나 싶었더니 기사에서 그것도 아니란다. 그럼에도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 대대적인 언론 홍보가 있었고 재단에서 돈 많이 퍼줬다는 점이 그 당시 기사마다 언급되었다. 그 이후로 근근이 기사가 있기는 했으나 출범 때만큼 기사량이 많지도 않다는 점에 나는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심지어 그 교수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꽤 이름 값하는 학자들이 참여하는 무료 강연인데 대체 저 기업 재단에서 대체 뭘 어떻게 유지를 하는 거지?
나는 재단 이름을 구글링했고 재단 홈페이지는 세련되고 깔끔한 프로그램 홍보 페이지와는 달리 옛날 옛적에 방치된 게 티 나는 비루한 디자인으로 날 반겼다. 비영리재단이 그렇듯 그 재단도 마찬가지로 재단 정보를 공개해뒀고 쉽게 그들의 재정현황에 접근할 수 있었다. 재단의 사업 중 큼직하다 할 만한 건 딱히 많지도 않은데 매해 큰돈이 들어오고 나간다는 점이 한눈에 보였고 대체 그들이 뭘 하길래? 이런 시대착오적 디자인의 홈페이지로? 나는 근질거림을 참지 못하고 그들의 세부지출내역 파일까지 열어보게 되었다.
내가 회계사가 아니니 딱히 그 파일을 본다고 내 의문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지출 내역 중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몇몇 지출 내역에 적힌 회사 중 돈은 천만 원 단위로 나갔는데 이름만 봐선 대체 뭐하는 데인지 모르겠는 회사들이 있길래 구글링해보니 재단의 기업과 마찬가지로 소규모 사업장이며 굳이 몇 천씩 돈지랄을 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싶은 것들을 판매했다. 그중 제일 특이했던 건 어느 서점 이름으로 몇 천이 지출되었길래 프로그램 참여한 학자들 인세 수익이라도 챙겨줬나 싶었더니 회사 이름을 구글링 해보니 왠 서울 소재 중고서적 전문 서점이 나온 것이었다. 유명한 서점인지 단순한 검색으로 서점 내부까지 구경해볼 수 있었고 누군가가 싼 가격으로 문제지를 구입할 수 있어 추천한다는 친절한 리뷰도 남겼다. 그 서점에서 몇천이 지출된 건 그 해뿐이 아니었고 더 의문점을 남기는 건 몇몇 년도는 지출내역에 나간 돈은 있는데 아예 회사 이름이 적혀있지 않기도 했다.
프로그램에 돈을 쏟아 부었다던 그 재단에 대한 수많은 찝찝함을 뒤로한 채 강연 프로그램에 대한 후기를 검색했고, 여러 의미로 갈만 한 사람들이 강연을 들으러 갔으며, 다들 참... "지식인"임을 남들에게 인정받는데 집착하는 어떤 경향성마저 보였다. 많은 후기를 읽던 중 한 열성 참가자의 자랑을 참지 못하는 글 속에 프로그램 출범부터 꽤 오랜 시간 그 프로그램에 한 정계 인사가 참여했다는 게 언급되었고... 그 교수가 정치사건에 꽤 지저분하게 얽혔다는 '소문'이 단순한 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에 대해 미화된 기억을 곱게 접어 휴지통에 넣고 영구 삭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그가 꿈에 그리던 정치권에 나름대로 잘 입성한 것처럼 보인다. 건강하고 활기차 보이셔서 다행이다. 다만 내가 신입생 시절 동경했던 빔 나오는 안광은 더 이상 기사 속 그의 사진에서 보이지 않을 뿐...
하도 이상한 걸 많이 발견해서 마치 기묘한 도시괴담을 추적한 기분이었다. 여하튼 사회의 잘 우려진 찝찝함을 단 몇 시간 만에 구글링만으로 맛볼 수 있었다는 점이 웃기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누구든 명심해야 한다. Google never forge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