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헤테로 연애 도전기
* 저는 돌 맞아 객사당하기 싫기 때문에 모든 인물의 실명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고 늘 관심 결핍 상태이기 때문에 분명 괴로울 걸 알면서도 항상 '호옥시'하는 마음에 헤테로 소개팅을 많이 했다. 뭐 거의 모든 소개팅들이 그렇듯 결과는 늘 처참했지만 나름 열심히 헤테로 연애에 도전해보긴 했다. 그중 처참함으로 큰 족적을 남긴 몇몇 소개팅들을 소개하려 한다.
몇 년 전 어느 가을의 저녁 7시쯤, 나는 과외를 마치고 헐레벌떡 지하철을 타고 왕십리 역으로 향했다. 룸메 Z와 Z의 지인 C와 함께 술을 마신 적 있었는데, 어쩐지 C와 친해져서 내게 두 다리 건너 그 소개팅을 주선해주었다. 사진을 받아보니 꽤 예쁘장하게 생긴 남성이었다. 나는 성별에 관계없이 예쁜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기뻤다.
그런데 상대가 '정신상태가 아슬아슬하고 가부장제를 매우 잘 체화함'이라는 종족 특성으로 유명한 K대 경영과 남대생이라는 소개를 듣고선, 상대에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나 설렘보다는 '야호 드디어 말로만 듣던 K대 경영남을 만나본다!!!'라는 마음에 두근거렸다.
왕십리 역에 도착해 상대에게 연락을 하자 근처라는 답장이 바로 왔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미남자를 찾았지만 저 인간은 아니었으면 하는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상대는 사진과 꽤... 다르게 아담한 아동복 모델... 체형의 남성이었다. 상대는 매너 있고 정중한 몸짓을 구사했지만 어쩐지 어린 소년에게 에스코트당하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 상대가 미리 알아보았다는 피자집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이 사람이 내 키가 자신보다 큰 것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낄지 아닐지가 매우 궁금했다.
피자집에 들어서자 온 몸을 떨리게 하는 커다란 비트가 나를 맞이 했다. 자리에 앉아 뭔가 대화를 해보려 해도 "네? 뭐라구요?"를 덧붙이며 대화가 끊기곤 했다. 장소 선정의 실패였다. 산만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자신의 군대생활, 축구, 경영학회, 그리고 게임 얘기를 고함치듯 열과 성을 다해 들려주었고 나는 음악이 커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시킨 피자가 나왔고, 나는 무척 배가 고팠고, 그 집은 피자가 맛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양껏 먹었다. 상대가 내게 "피자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피자가 제 페이버릿 푸드라고 하기엔 다른 음식들을 더 좋아하는데 지금은 너무 배고파서 이 접시 위의 피자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네요."라고 말하기엔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네! 저 피자 진짜 좋아해요!"라고 밝게 웃으며 거짓말을 했다.
식사 후 으레 그렇듯이 카페에 갔고 나는 차를, 상대는 커피를 시켰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들어갔던 그 카페는 피자집과 대조적으로 매우 조용했고(심지어 음악도 틀어놓지 않았다), 근처 대학의 대학생들이 매우 열심히 과제를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장소 선정의 실패였다. 차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커피를 못 마신다고 답하자, 상대는 웃으며 "애기네요"라고 말했다. 순간, 많은 말들이 울컥 떠올랐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떨구고 하하 웃어버렸다.
나는 자리에 앉아 상대의 뒤쪽에 공부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눈을 데룩데룩 굴리다 우수에 찬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한참 그러다 그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지루해서 기지를 발휘해 나의 원맨 토크쇼를 시작했다. 나보다 고작 한 살 연상이었던 상대는 내 이야기에 맞장구나 칠 것이지 덧붙이는 코멘트가 가관이었는데, 대부분 "애기네요", "아직 어리네요", "어리셔서 그런가 봐요", "귀엽네요"로 시작하는 말들이었다. 점점 표정관리도 안되고, 어쩐지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이야기를 멈추고 다 마신 찻잔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성인끼리 소개팅 나와서 "애기" 찾는 상대를 그냥 유치원까지 에스코트해주고 싶었다. 앞서 이 사람이 내 키가 자신보다 큰 것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내가 "옵뽜 저눈 커피 몬마셔여~ 힝힝"하며 혀 짧은 소리라도 내면 좋아 죽지 않을까...
결국 집에 통금이 있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라는 거짓말을 덧붙이며 상대와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상대의 애프터 신청이 와서 어떻게 정중하게 거절할지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칠 수가 없었다. '흥, 째깐한게 꼴값 떠네! 지 키가 제일 조막만하면서 쓸데없이 애기애기 붙여가면서 저를 미성숙한 인간으로 후려치는 게 기분이 나빠서 더 못 만나겠어요!'라고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왠지 서비스업 알바를 한바탕 뛰고 난 후처럼 진이 쫙 빠졌다. 집에 돌아가며 '헤테로 연애... 뭘까... 나는 끝없는 감정노동의 굴레에 도전해본 것인가... 남들은 대체 어떻게 잘들 연애하는 거지...'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상세한 소개팅 후기를 주선자인 C에게 들려주었고, C는 내게 석고대죄의 메시지를 보냈다. C에게는 맛있는 술을 뜯어내기로 했는데 아직도 C에게 맛있는 술을 대접받지 못했다. (보고 있나 C?)
하여튼, 왕십리의 맛있는 피자맥주집을 알아내어 맛있는 피자를 먹었다는 점이 그날의 가장 큰 소득이었다. 정말, 피자가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