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 모든 게 불안해 보였던 그 찰나.
공작의 말이 없어진 게 자신의 의견이 타당했기 때문이라 여겨서일까?
저스틴은 그의 분노를 짐작도 못한 채, 뻔뻔하게 테스에게 책임을 돌리며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였다.
“국민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남의 목숨을 뜯으라 던져주는, 그따위 걸 위로라고?”
“그때까지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이 미친..!? 안됩니다, 전하.”
“공작님!”
“그들이 무슨 책임이 있다고 묻겠다는 거지? 자네나 나나 증거는 하나도 없어.”
구겨진 자존심에 화가 나 부들거리던 저스틴은, 악에 받친 듯 독기를 품고 마크윈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대신, 그들을 성 내 지하 감옥에 구금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전하.”
“마녀들을 잡아오겠다는 얘긴가?”
“저는 저대로 그들이 역병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찾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군..”
여론은 점차 저스틴의 의견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악행에 가까운 그의 계책에 선뜻 찬성하지 못했던 귀족들도, 일단 데려와 추이를 지켜보자는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하..”
테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손으로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가 분노를 참을 수 없을 때, 어떻게든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하던 오랜 습관이었다.
눈치 없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그의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아는 마크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테스의 머릿속에는 저스틴의 멱살을 끌어당겨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는 상상이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뮐러 후작을 부르겠습니다.”
“?!”
이때까지 윌리엄*은 해역을 관리하기 위해 수도인 타헨을 벗어나 바다를 끼고 있는 빈트라는 도시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윌리엄 폰 뮐러, 헤르나의 아버지)
“마녀들을 데려오는 것은 저와 뮐러 후작이 하겠습니다. 현장에서 즉시 사살하는 것은 불가하며, 그들의 혐의가 입증되기 전까지 재판에 회부하는 것은 금하겠습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던 귀족들의 목소리는 일순 조용해졌다.
더 이상의 어떤 협상안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그의 태도에 마크윈도, 저스틴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
언제나 냉철하게 행동하는 테스와 다른, 마치 지옥불 같은 성미의 윌리엄.
귀족들은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본능적인 불편함이 올라왔다.
몇몇 그와 맞서다 맞아본 적도 있는 이들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이후 전서구를 통해 호출을 받은 윌리엄이 수도 타헨에 당도했다.
6.4피트의 큰 키와, 곰처럼 크고 단단한 체격.
특유의 붉은 머리칼은 바람에 날리며 얼굴에 자잘한 상처들을 가리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했다.
고대 전쟁에서 큰 힘을 발휘했을 전사 같아 보이는 그의 모습은, 미남임에도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이 그와 함께 도착한 용병들은, 하나같이 그의 주인처럼 거칠고 날카로운 눈매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수도의 사람들은 곧 제르만에 전쟁이라도 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새롭게 열린 회의
“뭐야, 이건.”
윌리엄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말투로, 내용은 알고 있으니 따분한 공론은 집어치우라며 서류를 테이블 밑으로 떨어뜨렸다.
“프로이센 공작의 요구사항은 명확합니다. 혹여 이 사항을 어기고 다른 일을 벌이신다면, 전하께서는 그에 따른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거의 협박하는 수준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말투에, 귀족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전하께 그게 무슨..!”
윌리엄은 귀족들을 쓱 쳐다보며 눈빛으로 압박한 뒤, 저스틴을 향해 비웃었다.
“그리고 자네는 내가 가져온 증거만큼 손가락을 내놓아야 할 거야.”
“뭐라고요!?”
“손가락만으로 부족하다면 발가락도 말이지.”
“정말 무례하십니다, 후작님!”
“무고한 사람을 잡아다 고문해서, 죄를 씌우자고 말하는 놈 입에서 무례라니. 그 입부터 찢어놓아야겠군.”
-오싹
“이렇게 일을 크게 벌였을 때는, 그만한 각오도 해야지.”
그의 말은 협박이나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새 싸늘하게 변한 윌리엄의 표정을 본 저스틴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스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곧 테스를 중심으로 한 마녀들의 체포가 시작되었다.
사람들 입에서는 마녀 토벌이나 마녀 사냥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국경을 넘어 도망가는 마녀들도 여럿 있었다.
두려움에 투항하지 않고 싸우다 죽은 마녀들도 생겨났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의 뛰어난 전술과 통솔력으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안전하게 생포되어 성으로 이송되었다.
이때까지 병을 이유로 성 안에서 칩거하고 있던 토흐튼 백작가에서도 참여하며, 수도에 있던 마녀들은 빠른 속도로 붙잡혔다.
한편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라는 충고가 무색하게, 성 안의 지하 감옥에서는 피비린내와 비명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들을 역병과 연관 지으려는 귀족의 수하들이 마녀들을 산채로 고문하며, 그들의 입에서 원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 지독하게 괴롭혔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의 빛이 꺼져가는 것을 느낀 마녀들은 이 안에 있는 모두가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래도 말을 안 하다니. 정말 지독한 종자들이군. 마녀는 원래 이런가?”
여기저기 못이 박힌 의자에 밧줄로 몸이 묶인 한 마녀가 앉아있었다.
손발톱이 모두 뽑힌 채 온몸이 인두로 지져진 그녀의 한쪽 눈에서 피가 흘렀다.
”……무고한 생명을 해친 너희들은, 이제 진짜로 저주를 받아 죽게 될 것이다..“
”에토르의 신이.. 이 비극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거두어 갈 테니……“
예언일지, 저주일지 모를 그녀의 말을 들은 간수들은 일제히 몸에 소름이 돋으며 구역질이 났다.
분노를 참지 못한 간수들이 불에 달군 칼로 그녀의 배를 찔러 살해했고, 시체에도 계속 난도질을 해댔다.
‘마녀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마녀들이 제물을 바쳐 역신에게 이 땅에 저주를 걸게 만들었다.’
빠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내놓은 이야기들과 소문.
증거 하나 없는 허무맹랑한 말들이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믿었다.
진짜 그런 죄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아니, 그들에게 죄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다수의 국민들은 역병이 자리한 현 상황을 회피하고, 분노를 떠넘기고 싶은 무언가가 필요한 것 같았다.
왕실을 향했던 국민들의 분노는 조금씩 마녀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수도를 벗어나 지방으로 내려갔던 테스와 윌리엄에게 전달되었다.
“감히..!”
마크윈도, 다른 귀족들도 그만한 배짱은 없었는데.
루이스 자작이 사람들에게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거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협상을 깨고, 겁도 없이 일을 진행하다니.
“올라가야겠군, 테스.”
“…그래.”
테스와 윌리엄은 서둘러 수도로 올라갔고, 도착한 뒤 곧장 성으로 말을 달렸다.
지하감옥에서 고문을 행하던 이들을 모조리 척살한 뒤, 왕과 귀족들이 모여있다는 야외의 정원으로 향했다.
“하하하하..”
“이제 좀 한숨 놓이겠군요.”
멀리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이 구역질 난다.
어째서 저런 것들이 정치를 한다는 귀족이지?
분노에 찬 테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지하에서는 비명소리가 떠나질 않던데, 그 위를 밟고선 다들 티파티라니.”
“?! ..고, 공작...!”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
테스는 당황하는 마크윈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치며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대체 전하께서 마시고 있는 게 뭡니까. 차입니까, 저들의 피눈물입니까.”
“아.. 그게..”
“전하께서는 제게 한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와 함께.”
“지, 진정하게. 그게..”
테스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한 사람씩 각 귀족들의 옆에 선 뒤 그들의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검을 들어 손잡이로 내려 찍었다.
“아아악!!”
“으악!!”
“악!!!!”
끔찍한 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린 마크윈에게 테스가 다가가 허리를 숙여 속삭였다.
“이런 모습도 보기 힘들어하시면서, 그런 일을 허락하시다니. 전하께서 지하감옥에 직접 내려가 보셨더라면, 저들을 막아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
“칼날로 내려친 게 아니라 다행이지 않습니까.”
“고문은.. 중지하라 이르겠네. 그러니 그만..”
테스는 그 자리에 모인 모두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훑어보며 눈빛으로 압박했다.
몰래 뒷일을 벌이며 즐겁게 웃던 입들은 모두 다물린 채, 신음소리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혼이 난 강아지들처럼 기죽어 있는 귀족들을 보던 윌리엄은 씩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뮐러 후작이다.”
루이스 저택에 도착한 그는, 누군지 밝히지 않아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을 던져주었다.
저택에 사전 연락 없이 방문했다는 이유로, 기다려 달라며 막아선 경비병 둘을 때려눕힌 뒤, 집무실에 앉아있는 저스틴을 발견하고 책상을 발로 차버렸다.
“운이 좋아. 이런 날은 또 집에 있으니. 아니다, 운이 나쁜 건가?”
“뮈.. 뮐러 후작..!”
“약속도 기억을 못 하는 걸 보니, 머리는 장식으로 달려있는 거군. 쓸데없으니 잘라주지.”
“커..컥..”
윌리엄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저스틴의 멱살을 강하게 틀어쥐고 머리를 책상에 짓누른 뒤, 거친 손으로 목의 급소를 눌렀다.
저스틴은 충격과 공포에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명백하게 우리의 적이 되기로 했으니, 더 이상의 자비는 없을 거야. 다만 당신의 아들과 스카드가 친구라는 점을 감안해, 어린 아들을 위해 목숨은 살려주지.”
“……”
이후 국경을 맡은 토흐튼 백작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은 각 저택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지방에는 프로이센과 뮐러의 사병을 파견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그들을 조사하게 했고, 테스와 윌리엄은 왕실과 귀족의 감시를 위해 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