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경단녀가 되는 동안,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엄마로 살면서 '나'의 존재를 저~ 멀리 방치한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한편으론 미안했다.
매일같이 늦는 남편 덕택에 아이 둘을 독박육아하며, 때론 남편이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왜 나만 헌신해야 하는가','왜 나만 정체되어 있는가','왜 나는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는가'를되뇌었다.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을 만나며 '다 똑같이 사는구나' 하고 단정 지어 버렸다. 사실 난 그들 속에서 답을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두 답을 모른 채, 그날그날의 현실만을 이야기하며 투정할 뿐이었다. 미래가 없었고, 성장이 없었다. 그래서 더 공허했다.
이제라도 온전한 '나'를 찾겠다며, 올 한 해 '나를 만들어가는 시간'을 조금씩 연습했다.
다시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또 다른 엄마들 곁에서.
그들은 자가발전기 마냥 스스로 발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들은 내가 스스로 발전할 수 있도록 열기를 나눠주는, 나의 곁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있었다. 그들 덕분에 생각도 많아지고, 혼자서는 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일들을 하나하나 실행 할 수 있었다.
내가 '조력자'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듣고 말했던 것은 회사 생활을 했을 때다. 당시 편의점 계약업무를 담당하면서 편의점 운영을 준비하는 경영주들과 수많은 조력자들을 만났다.
점포를 주도적으로 맡아 운영하는 경영주 외에 그 곁에서 돕는 자를 조력자라 칭한다. 편의점은 대체로 알바를 구인하여 운영하지만 원활하지 않을 경우, 경영주와 조력자가 12시간씩 교대근무를 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도 발생한다. 그러므로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의 특성상 믿고 맡길 수 있는, 함께 운영할 수 있는 조력자는 필수다.
이렇게 조력자는 누군가의 곁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문득 떠오른 조력자라는 단어 앞에 나 또한 누군가의 곁에서 돕는 자 그 자체로 살았던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태생부터가 조력자로 설계된 것이 아닐까?
남편 곁에서 돕는 베필로, 아이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곁에서 돕는 엄마로, 내게 주어진 그 역할대로 나름 잘 살아내고 있었구나.
나의 존재를 잊었다고 나 자신이 불쌍하다며 스스로를 안타깝게만 생각했는데,
그들 곁에서 돕는 자, 조력자 자체가 '나'인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게 그거일 수 있지만, 내 관점에서는 스스로 이것을 인정하게 됐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전쟁은 이제 그만 - 케테콜비츠
고통받는 이웃의 삶을 작품에 담았던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는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은 아니라며,
1차 세계대전 당시 보호받지 못했던 약자들 편에 서 한평생 그들을 위해 투쟁했던 화가이다.
(내가 사랑한 화가들 p.210)
나는 이 시대에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싶다
그녀가 했던 이 말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화려한 화가의 삶이 아닌 항상 낮은 자들 곁에서 자신의 재능이 쓰임 받길 원했던 케테콜비츠,
그녀 또한 그들 곁에 한 명의 조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내가 만약 작은 사회인 가정에서 조차 조력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작은 손길을 내밀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난 여태 가정에서 조력자의 역할을 연습한 것이다.
조력자가 되어 도움을 주든, 도움을 받든 어차피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내가 속한 가정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누군가의 곁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의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