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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Aug 03. 2020

Staycation동안 읽은 책과 영화들

코로나 때문에 어디 가기도 뭐하고 해서, "Staycation"을 선언한 다음 "집에서 일 안하기"를 실천했다. 좋은 책과 영화들이 있어서 충만했던 며칠.






한국 단편소설의 힘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집], 문학동네 (김봉곤 작가가 수상을 반납하기 전 산 책)


한 작품도 빼지 않고 모두 묵직했다. 영화나 k-pop과 마찬가지로 한국문학도 세계적 수준의 작품을 내놓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번역하기가 힘들어 외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일 뿐.


대상을 받은 강화길의 <음복>은 봉준호의 “장르 뒤집기”를 연상시킨다. 이 소설이 차용하고 있는 스릴러는 주인공이 숨겨진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서사이다. 그리고 보통 진실을 알게 된 자는 권력을 획득한다. 하지만 <음복>의 주인공은 진실을 알게 됨으로써 약자가 된다. 이 모든 지저분한 세계를 “알 필요가 없는” 남편의 환한 표정이라니. 소외당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당당함이라니. 다 읽고 나니 뒷목이 뻣뻣해왔다.


<음복>이외에도 소설집은 여성의 서사로 가득 차 있다. (김봉곤을 제외한) 여섯 명 작가 중 이현석 한 사람만 남성이고,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 는 낙태죄 합헌을 둘러싼 여성의 서사이다. 김초엽 <인지공간>의 표준화된 세계에서 소외받는 자들과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장류진 <연수> 의 여성들간의 연대들. 한 작품이 끝날때마다 책을 덮고 한참을 멍했다. 한국 소설의 미래는 여성들이 이끄는 듯. 



불편한 아름다움

[Chronicle of a Death Foretold], Gabriel Garcia Marquez


한국어판 제목은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는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해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강가 마을의 분위기, 피와 강물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매우 불편했다. 이 책이 나온 후 40년동안 성평등에 대한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들은 (특히 성평등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전근대적이다. 이 전근대적 사회를 그려내는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자칫하면 대상을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게 한다.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봐야겠지만, 최소한 이 작품에서는 “리얼리즘”에 따르는 “현실의 풍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끝이 시작이라는 안도감

<인사이드 르윈>


코엔 형제의 2013년 작. 내 인생 베스트 영화 목록에 들어갈 것 같다. 사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다니. 끝을 모르고 추락하던 르윈의 마지막이 사실은 처음이었다는 반전 아닌 반전에서, 벼랑 끝에서의 안도감을 느꼈다. 저승사자처럼 등장해서 르윈에게 한 방을 먹이는 이름 모를 아저씨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영화 내내 뜬금없이 등장하는 고양이가 무엇을 상징하는데, 왜 고양이의 이름이 “Ulysses”인지 감을 못 잡았는데, 역시나 인터넷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글들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 엘리엇... 아직 봐야 할 레퍼런스들이 많구나. 또 이동진의 해설 클립에 달린 댓글은 오디세이 신화를 바탕으로 한 해석을 해주었다. 요약하자면, 패배의 서사인 줄 알았던 르윈의 이야기는 사실은 승리의 서사였다는 것.


지워질지도 모르니, 여기에 옮겨둔다.


사실 이 고양이는 르윈 그 자체라는 표현이 더 맞을겁니다. 고양이의 이름은 율리시스로 그리스 신화 오디세우스의 라틴어입니다.

자, 리뷰에도 나왔지만 르윈이 골파인 교수 집에서 르윈이 수컷 고양이 대신 암컷 고양이를 데려 왔음이 밝혀지는 장면을 봅시다. 이 장면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향하던 길에 아킬레우스를 데려가려 할 때 아킬레우스가 ‘여장’을 하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한 것을 연상시킵다. 그 뒤 르윈이 뉴욕에서 시카고로,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그 자체로 오디세우스가 이타카에서 트로이로, 다시 한참을 헤매어 이타카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닮아 있죠.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로 돌아오는 내내 포세이돈의 진노를 산 대가로 온갖 비현실적인 역경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르윈 역시 영화 내내 온갖 불행한 우연의 연속으로 끝없이 추락해 가죠.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갖은 고행을 겪는 동안 고향 이타카에는 오디세우스가 죽었으리란 소문이 퍼지지만, 기적적으로 오디세우스는 살아돌아옵니다.   

이 점에서 ‘뿔의 문’에서의 오디션 장면 역시 새로운 맥락 하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오는 꿈을 꾸지만 그 꿈을 믿지 않습니다. 그때 그녀는 ‘뿔의 문’과 ‘상아의 문’ 비유를 드는데, ‘뿔의 문’을 통해 전달되는 꿈들은 모두 실현되지만 ‘상아의 문’을 통해 전달되는 꿈들은 모두 거짓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오는 꿈이 ‘상아의 문’을 통해 들어온 꿈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오디세우스는 돌아오고, 그 꿈은 결국 ‘뿔의 문’을 통해 들어온 꿈인 셈이 됩니다. 즉, 오디세우스의 이야기 속에서 ‘뿔의 문’은 꿈이 실현되는 공간인 동시에 집으로의 귀환을 약속하는 공간인 셈입니다. 더군다나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귀환하며 들고 오는 소식은 ‘트로이’에서의 승전 소식이기도 합니다. ‘뿔의 문’에서의 르윈의 오디션은 실패로 돌아갔고 르윈은 그 순간 ‘트로이’라는 청년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듯 느낀 바 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의 이름이 ‘율리시스’임이 드러나는 순간, ‘뿔의 문’에서의 오디션은 여전히 그의 꿈이 ‘유효’하며, 결코 ‘트로이’에 르윈 자신이 패배한 것도 아니며, 다만 그 꿈이 실현되는 곳은 멀리 떨어진 시카고가 아니라 그가 귀환한 집, 바로 자신이 머물러 있는 뉴욕이라는 공간, 바로 그 곳이리라는 희망으로 재해석되는 것입니다.   

딱 이 지점에서 오프닝씬과 엔딩씬을 생각해봅시다. 오프닝에서 르윈이 부르는 ‘Hang Me Oh Hang Me’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르윈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언급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오프닝에선 르윈이 ‘Fare Thee Well’을 솔로로 부르는 장면이 생략됩니다. 때문에 그 뒤에 ‘마이크랑 부르던 곡이잖아.’라는 대사가 이어지면, 관객은 자연스레 ‘Hang Me Oh Hang Me’가 마이크와 르윈의 듀엣곡이었던 것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 맥락 하에서라면, 마이크가 자살할 당시의 현재와 르윈의 절망적인 현재가 겹쳐진 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르윈이 정장 입은 사내에게 맞을 때도 그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마치 르윈의 공연 자체가 그 남자에게 불쾌하게 받아들여져 그가 얻어맞은 것처럼 그려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르윈의 음악은 여전히 제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태이며, 그의 미래는 더욱 암담하기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엔딩씬에서는 오프닝과 달리 ‘Hang Me Oh Hang Me’ 이후 ‘Fare Thee Well’을 솔로가 나오고 호응을 얻습니다. 이제 그 뒤에 이어지는 마이크와의 듀엣 운운하는 대사는 바로 ‘Fare Thee Well’을 가리킨 대사였음이 한층 더 명확해집니다. 그렇다면 ‘Hang Me Oh Hang Me’에서 ‘Fare Thee Well’로 이어지는 르윈의 공연은 이제 미국을 돌아온 여정 끝에 비로소 르윈이 마이크라는 죽은 친구의 환영을 극복하고(그와 ‘Fare Thee Well’이라는 노랫말이 가리키듯 작별인사를 나누고)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뉴욕, '가스등 카페'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는 쪽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정장 사내에게 얻어맞는 부분에서도 정장 사내의 대사가 추가됨으로써, 그가 그 전 날 자신의 아내가 무대에 서서 노래할 때 이를 조롱하며 난동을 부렸던 르윈의 행동 때문에 르윈을 때렸다는 것이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그 전 날 저녁만 해도, 즉, 르윈이 ‘율리시스’라는 이름을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삶은 온갖 우연과 불확실성으로 르윈을 몰락시켜 가는 듯했습니다. 그렇지만 ‘율리시스’라는 이름 하에 이제 음악은 다시 그의 꿈이자 희망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장 사내가 르윈을 폭행한 뒤 자신의 아내는 단지 노래하고 싶은 열망으로 무대에 선 것이라며 말할 때, 르윈의 표정은 오히려 밝아 보입니다. 꿈 하나만으로 노래를 불렀던, 어쩌면 과거의 자신의 모습과 같은 그 여인을 조롱했던 그 날 자신의 행위가 그렇게 다시 한 번 부정된다는 점에서, 음악이라는 꿈이 다시금 긍정되는 장면이 되는 것입니다. 어쩐지 정장 사내가 탄 택시가 떠날때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던지는 르윈의 표정은 왠지모르게 밝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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