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3장, '노동'
[인간의 조건]을 끙끙대면서 읽고 있는 중. 문장들은 모호하고, 논증은 불친절하고, 번역은 불완전하다. 서양철학사상을 제대로 파보지 않은 나로서는, 아렌트의 서양철학에 대한 비판적 해설의 문맥을 잡기가 어렵다. 사실상 나는 서양철학을 아렌트로 입문하는 셈.
그런데 읽다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순간이 계속 찾아온다. 글 속에서 한참을 헤메다 보니, 문득 이 책이 ‘매우 좋은 자기계발서’라는 깨달음이 왔다. 첫 눈에는 혼란스럽기만 했던 ‘노동’과 ‘작업’의 차이, ‘생명’과 ‘세계’의 차이, ‘부’와 ‘재산’의 차이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아렌트는 “내가 바라는 삶의 이상적 모델”을 정교하게 서술해주고 있었다.
아렌트는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의 기조를 이루었던 “관조적 철학”을 비판하면서, 세계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실천적 철학”을 중시한다. 명징하고 부조리없는 이성만을 중요시하는 관조적 철학은 어지러운 현실세계와 대면하면 막상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고, 오히려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권하게 된다. 하지만 아렌트는, 니체처럼 있는 그대로의 삶을 전면적으로 긍정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삶 속에는 분명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열망들이 있다. 그 열망들이 자생적으로 증폭하는 것을 그대로 놔 둔다면, 인간의 삶은 동물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부조리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동시에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 세계에 대한 강한 긍정을 가지는 삶. 정확하다. 아렌트의 정교한 논증을 따라가보자.
이 글에서 인용한 두 권의 책:
1.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진우 옮김, 한길사 (2019년 제2개정판)
2.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나카마사 마사키, 김경원 옮김, 아르테
아렌트는 필연성necessity을 “삶의 기본적 조건”이라고 정의한다. (‘필연성’ 보다는 ‘필요’가 더 좋은 번역이 아니었을까).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하고, 너무 덥지도 따뜻하지도 않아야 하고, 청결한 환경에 몸을 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못하면—즉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으면—인간은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데에만 몰두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리스에 의하면, 이러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노예’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노예에게 없는 두 자질은—이 자질의 결핍으로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고 여겨진다—스스로 숙고해서 결정하는 능력과 앞날을 예견하여 선택하는 능력이다. 물론 이것은 노예가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히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아렌트, 171]
>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천적인 성질의 능력에 따라 ‘인간’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가리켜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마사키, 168]
이 통찰을 근거로, 아렌트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노동이라고 부르는 활동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노동”과 “작업”. 아렌트의 “노동”은 인간이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하는 행위이다. 아마도 밥 짓기, 청소하기 등의 ‘가사 노동’이 대표적으로 이에 해당될 것이다. “노동”은 세계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 수단으로만 쓰인다. 반면, “작업”은 이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이 노동/작업의 구분은 아렌트 사상의 핵심이며, 아렌트가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중요 지점이 된다.
> 아렌트가 이해하기에 애덤 스미스나 마르크스가 ‘생산적 노동’만 중시한 까닭은 ‘노동’을 실은 ‘작업’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살펴 왔듯 ‘작업’은 ‘활동’의 기반을 이루는 인공적 사물의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반면 주인의 ‘소비’를 도울 뿐인 ‘비생산적 노동’은 단순한 생명 유지 활동에 가깝기 때문에 아렌트가 말하는 본래적 의미의 ‘노동’에 가깝습니다. [마사키, 174]
“삶의 필연성을 극복하기”. 이는 인간이 세계에 의미있는 공헌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직장을 다니는 ‘압도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돈’이다. 육체노동자, 지식노동자, 전문가, 비전문가 할 것 없이 월급을 얼마 받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앞으로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돈’은 그 돈이 많든 적든간에 ‘생존’과 직결된다. 생존에 급급한 현대인들은 생활의 필요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직업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점점 망각하게 된다.
> 애초에 근대에는 지적 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둘 다 노동이고, ‘유용하다useful’는 것을 기준으로 노동을 평가하기 때문에 지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사회에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수입을 얻는 것이지요. 생활의 필요로부터 해방된 상태에서 종사하는 활동과는 다릅니다.
결국 근대에는 공적영역의 ‘활동’이 의미를 잃어버리고 모든 인간의 행위를 ‘노동’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사키, 181-182]
첫번째 레슨:
생존을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은 좋은 삶을 위한 필수요건이지만, 그 자체에 함몰되면 ‘행복한 돼지’나 다름없게 된다. 삶의 더 큰 목적은 세계성에 있다.
아렌트는 재산property은 부wealth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10년 전 쯤 서울시 지하철 역에 붙어있던 공익광고 중에 “집은 사는 ‘곳’이지 사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카피를 본 적이 있다. 글자 하나만 바뀌었을 뿐인데, 연상되는 이미지가 매우 다르다. 사는 ‘곳’으로서의 집이라고 하면 내 동네, 집 앞의 공원, 지하철역 가는 길의 커피숍과 식당들이 연상된다. 하지만 사는 ‘것’으로서의 집이 가지는 의미는 딱 하나이다. ‘가격’. [어린 왕자] 에서 빨간 벽돌집을 두고 어른들이 했던 말을 생각해보라.
아렌트의 재산과 부의 차이가 이 지점에서 나온다. 아렌트에 의하면 ‘재산’은 개인이 소유하는 물건이지만, 여전히 공공의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내 집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동네를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하지만 단지 숫자에 불과한 ‘부’에는 세계와의 관련성이 전혀 없다. 자신의 소유물을 ‘부’로써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세계과의 끈을 잃고 자신 안에 갇히게 된다.
> 아렌트는 ‘세계’ 속에 각자의 고유한 자리를 부여하는 ‘재산’과 신체에 직접 담겨 있는 활동력인 노동을 활용해 ‘사물’을 ‘전유’하고 ‘부’를 증대시키는 행위는 대립적 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마사키, 206]
그런데 근대의 경제 체제는, 특히 화폐는 사람들의 재산을 부로 인식하게 해 주었다. 삶을 영위하는 활동에 불과하던 노동의 대가가 사라지지 않는 화폐로 주어졌고, 이로 인해 “노동의 명백한 불명예를 없애”주었다 [아렌트, 191]. 이로 인해 근대 이후의 인간들은 자신의 소유물들이 세계와 맺는 관계성을 점점 더 무시하게 되었고, 오로지 부의 최대 추구만을 삶의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근대가 그렇게도 열렬히 옹호했던 것은 소유 자체가 아니라 방해받지 않고 보다 많은 소유나 사유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아렌트 200]
> 소유는 증가하는 부와 자기화가 공동 세계의 존속을 위협했을 때에도 여전히 공동세계와 연관되어 있었다. 소유는 세계안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노동과정의 무세계성을 강화시키기보다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 주된관심이 소유가 아니라 부의 성장과 축적과정 자체가 된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부의 축적과정은 어떤 종의 삶의 과정만큼이나 무한할 수 있다. [아렌트, 206]
그런데 왜 인간은 ‘부’를 끊임없이 추구하려고 할까? 생각해보면, 생활수준이 어느정도 이상이 되면 행복도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데이타 이전에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아렌트는 근대인의 ‘부의 추구’를 다윈의 ‘무한의 확장을 추구하는 생명체들’에 빗대어서 설명한다. 진화사회학적으로 일리 있는 가설이 아닐까?
> 근대인이 부를 획득하려는 욕구의 본질은 ‘사물’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기를 재생산하려는 ‘생명life’에 있다는 것이 아렌트의 분석입니다. 자기 증식하는 ‘생명’이 사물에 내구성을 부여하고 시민에게 아이덴티티를 부여함으로써 서사를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 세계’를 짓밟아 부서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사키, 204]
두번째 레슨:
‘부’를 추구하지 말자. 물론 나와 내 가족의 생물학적 조건이 위협을 받지는 말아야 한다. 하지만 생명의 필연성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는 즉시, 나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다 쏟자.
신체적 삶에만 전념해야 하는 상태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을 세계에서 추방하는 것은 없다. [아렌트, 203]
고통이 느껴지면, 인간은 자신만 생각하게 된다. 고통은 삶에 대한 위협의 신호이고, 이 신호는 “삶의 확장”이 유일한 목적인 유전자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고통 앞에서 ‘세계’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 고통을 계기로 자신의 신체에 의식을 집중시킴으로써 사람은 ‘세계로부터 동떨어지고 맙니다. 그것은 ‘세계’가 없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노동’의 ‘고통’은 그러한 ‘무세계성’과 통합니다. [마사키, 212]
하지만 ‘고통이 전혀 없는 삶’ 역시 세계성과는 거리가 멀다. 고통이 있어야 타인과 나를 연결할 수 있다. 세계성에 대한 욕구는 합리적 이상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타인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본능에서도 나온다.
> 신체가 혼란스러운 상태가 아니거나 혼란으로 인해 내팽개쳐진 상태가 아닌 경우에만 우리의 신체감각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인다. 고통의 부재는 대개 고통과 비고통의 짧은 중간 단계에서만 ‘느껴진다’. [아렌트, 203]
세번째 레슨:
내 안의 고통을 조용히 관찰하자. 내가 느끼는 고통을 타인과의 연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