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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Sep 18. 2020

최고급의 한국어로 쓰여진 공부 이야기

[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김영민 교수의 섬세하고 적확한 문장들. 한국어로 된 고급 산문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는 보석 같은 글.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김영민 교수는 한국어 지식 공동체에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될 것이다.



김영민 교수는 몇 해 전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으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이 책의 제목도 “공부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의 "...무엇인가" 시리즈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저자의 평소 신념이 드러난 의문이라는 것을 알겠다. 우리가 관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와 문장들은 사실 그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 “결혼식”을 하려면 스드메가 필요하고, 혼수가 필요하고, 신랑신부 지인들보다 양가 부모의 지인들이 더 많아야 하는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면, 새로운 결혼식 문화가 어떻게 되어야 할까 고민이라면, 우리는 “결혼식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독일 철학자들의 '말장난'처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말하는 단어들의 근원을 파고들어가보는 것. 


> 세상은 부정확하고 조리에 맞지 않는 말들이 넘실대는 홍해와 같다. 오해와 몰이해의 위럼으로 가득한 홍해를 가르고, 젖과 꿀이 흐르는 의사소통의 땅으로 건너가려면,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를 가능한 한 날카롭게 버려내어 의미의 피륙을 재단할 필요가 있다.  -[알맞은 이름을 불러다오]
>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면,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 만남에는 섬세한 언어가 필수적이다. -[정신의 척추 기립근을 세우기 위해서]


개념을 정확하게 재단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모순을 맞이하게 된다. 결혼식은 둘이 앞으로 잘 살아가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자리이니 화려한 식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남들의 화려한 예식을 쫓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모순적인 생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저자는 말한다. 도망가지도, 그렇다고 미쳐버리지도 말아야 한다.

> 모순이나 긴장 없는 삶이 가능할까? 그럴 리가. 삶 속에는 서로 잘 화해되지 않는 에너지가 공존하곤 한다. (…) 모순 혹은 긴장으로 가득한 자신의 존재를 그럭저럭 거두어 살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인의 일이며, 자신의 모순이나 긴장을 빙자하여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시민의 덕성이다 -[세상에 대해 논술문을 쓰기 위해서는]
> 이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이러한 모순, 긴장, 혹은 혼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주제로 논술문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모순과 긴장과 혼란을 직시하되, 그에 대해 가능한 한, 모순 없는 문장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 논술문을 쓰기 위해서는]



공부에 게으른 나를 날카롭게 찌르는 문장들이 수두룩하다.


김영민 교수의 문장들을 읽다가 좀 마음이 아팠다. 나태해진 나를 반성하면서, '공부 전문가'인 저자의 조언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자.


1. 삶의 에너지를 보존해서 가장 효율적인 곳에 써야 한다.



> 윈스턴 처칠의 조언을 경청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 인생의 성공 비결을 묻자,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다. “에너지 절약이 관건이다. 앉을 수 있는데도 서 있어서는 안 된다. 누울 수 있는데도,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지적인 헛소리를 하지 않으려면]


이 책에서 가장 끌린 문구이다! 최대한 앉고, 눕도록 하자. 에너지를 보존하자.


> 평소보다 좀 더 무거운 지적 무게를 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율이 필요합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는 주기적으로 정해진 일을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수업은 여러분들의 지적 변화를 목표로 합니다]


주기적으로 정해진 일을 하는 것의 장점은, 에너지가 절약된다는 것이다. 매일 가는 출근길을 운전하는 것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 노년이 되면 체력이 현격히 저하된다. 그때 가서 새삼 구해야 할 나라 같은 게 있으면 너무 피곤할 것 같다. 꾸준히 공부해왔다면, 공부가 이미 습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 매번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단에 필요한 에너지를 절약하여,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배우는 거다. 수중에 돈이 있으면 기꺼이 지불하면서. -[인생 역정 만루 홈런은 없습니다]



2. 영감을 주는 사람들의 자장 안에 있어야 한다.


> 우리는 멍게가 아니므로 흥미로운 험지를 기꺼이 찾아다녀야 한다. 과제가 많기는 해도 영감이 넘치는 강의, 낯설지만 자극이 넘치는 장소, 까다롭지만 창의적인 인물을 찾아 그 자장 안에 있어야 한다. 물론 그곳이 험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익하고 재미있는 강의는 대개 많은 과제가 따르고, 흥미롭고 탄성을 자아내는 환경은 위험하기 마련이며, 창의적인 사람은 예민하거나 괴짜인 경우가 수두룩하다. -[공부와 창의성]


내가 가장 못 하는 것. 나는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까다롭지만 창의적인 인물”을 잘 만나지 못한다. 그 까다로운 interface 를 감내할 수만 있다면, 풍요로운 생각의 보물창고를 만날 수 있다.



3. 선행연구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 프로포절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반응은, 이 연구가 수행되고 나면 이 분야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관련 연구자들이 갖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려면, 이른바 선행 연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연구 계획서 쓰는 법]


“이 분야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모든 연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분야”에 대한 정확한, 그러면서도 독창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4. 남의 연구를 비평할 때는,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비판해야 한다.


> 첫째, 상대 주장의 약점보다는 강점과 마주하여 비판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 상대의 핵심 주장에 강점이 있음에도 상대가 보인 약점에 탐닉한 나머지 그것을 상대의 ‘본질’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 기를 쓰고 상대 주장의 강점을 찾아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비판의 덕성]


> 벤저민 프랭클린은 “비판이나 비난, 불평만 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고, 대다수의 바보들이 그렇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가능하다면 건설적인 제언이나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다. -[비판의 덕성]


가장 찔렸던 부분. 남의 약점만 집어내면 안 된다. 이는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토론으로 이어진다. 강점을 마주하고, 그 강점을 비평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5.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글 말미의 인터뷰에서, ‘정년이 될 때까지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저자는 “우선 부끄럽지 않은 직장에서 정년을 맞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자신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이롭게 만들고 싶은 것이 가장 첫번째 목표라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미나를 잘 유지하는 방법에서도 그 특유의 공동체에 대한 철학이 엿보인다. 이렇게 진행되는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다면, 큰 영광일 것 같다.


> 엘리너 오스트롬과 같은 정치학자는 공유재의 비극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공유재를 사용할 당사자들이 직접 그 공유재의 생산과 공급 과정에 참가하고, 많은 상황의 변수를 고려해서 제도를 구체적으로 잘 설계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선생은 그 학기의 특수 사정을 고려하여 학생들이 서로 배울 수 있도록 세미나를 구체적으로 잘 설계해야 한다. 토론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레벨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이 좋은지, 주제나 성격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 인원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지, 과거 세미나의 관성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를 고려하여 잘 설계해야 한다. 늘 준비된 상태로 임하도록 만들고, 그러면서도 미리 준비하지 않은 즉흥적 발상마저도 소화할 수 있게끔 세미나 판을 벌여야 한다. 구성원들이 서로 호혜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독려하고, 가능하면 세미나의 당사자들이 토론의 규칙을 서로 정하게 하고, 규칙 위반 시의 제재에도 자율적인 성격이 가미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세미나를 즐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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