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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시현 Sep 26. 2022

여자의 삶은 진화하는가?

스스로 갇힌 삶.

     

 그녀는 곱상한 얼굴에 40이 넘어 보이지 않는 여자였다.

나는 집을 구하고 있었고, 부동산 업자가 그녀의 집을 소개했다. 집을 둘러보고 나서 그 집을 설명하거나 내 질문에 대답하는 이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꽤나 적극적으로 집을 설명했고,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남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계약 당일 부동산으로 가자 그녀 혼자 나와 있었다. 남편은 바쁜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혼자 왔노라 했다. 계약서를 다 쓴 부동산 사장이 서류를 내밀며 도장을 찍으라고 하자- 그녀는 도장이 들어있는 가죽 지갑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는 가슴팍에 살포시 갖다 댔다. 너무 낯선 몸짓이었다. 잠시 후 그녀가 뱉은 말은 더 낯선 말이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슴에 품고 있는 듯한 몸짓을 하던 여자가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세상 야릇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가 감히....

여자가 감히.....   

       

 P는 동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결혼 한 이후 동양화는 그녀에게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가족이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자신은 주일예배에 빠지고 기도하지 않더라도 아내에게는 그것을 요구했다. 집 안 청소와 반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남편은 참 세세하게도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남편이 티비를 볼 때면 그녀도 그 옆에 앉아 같이 봐야 했단다. 작은 요구라도 들어주지 않을 때 생기는 후폭풍이 너무 커 모두 들어주는 것이 차라리 편했노라 했다. 세월이 흘러 자식들이 크자, 고등학생인 아들이 외출해 있는 그녀에게 전화해, 윗집에서 뛰고 있으니 빨리 들어와서 윗집을 조용히 시켜달라고 했단다. 그녀는 남편에 이어 자식들의 요구까지 다 들어주었다.

IMF 사태 때는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그녀가 집 앞 김밥집에서 하루 종일 김밥을 말았다. 퉁퉁 부은 손으로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종일 빈둥대던 남편과 두 아들이 빨리 저녁을 달라고 채근을 해서 옷도 못 갈아입고 부랴부랴 저녁을 차렸다고, 길고 긴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았냐고 물으면 그녀는 대답 대신 더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50이 넘어 그녀는 유방암에 걸렸다. 수술을 하고 요양병원에 있는 그녀에게 결혼까지 한 아들이 찾아와, 오늘 내 생일인데 엄마 뭐 해줄거냐고 묻더라고 했다. 그녀는 집에 있는 것보다 요양병원에 있는 게 좋다고 했다.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는 그녀는 안중에 없이 혼자 밥을 차려 먹는 남편이 있는 집이 불편하고 싫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상황을 바꾸려 하거나 남편과 자식들에게 할 수 있는 요구를 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회의 소모임에 나와 푸념을 늘어놓는 것이 그녀가 갖고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녀의 삶의 방식은 여전하다. 지금은 아들 며느리의 부탁을 받아 손녀를 돌보고 있다.  


      


남편, 남편, 남편.


K는 유능한 여자였다. K와 나는 같은 학원의 강사였다. 같은 강사였지만 나는 그녀의 유능함에 늘 감탄하곤 했다. 다른 강사들은 대부분 이동하는 시간을 계산해 지역을 크게 벌리는 것을 꺼려했지만, 그녀는 그런 게 없었다. 강북의 북쪽과 동쪽을 오갔고, 하루에 2번씩 한강을 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그녀를 철의 여인이라 불렀다.

그녀의 남편은 대학의 시간 강사였다. 남편이 교수가 되는 게 부부의 일치된 소원이었다. 남편의 수입은 차에 기름 넣고 밥 사먹으면 끝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실제 그녀는 새벽 2시까지 수업을 하며 두 아들이 있는 집안의 모든 살림을 감당했다. 두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야 하기 때문에. 제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 아침이 너무 끔찍하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그런 육체의 피곤이 아니었단다. 치뤄야만 하는 집안의 대소사, 아이들 교육, 심지어 집의 보증금을 올려주어야 할 때도 남편은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다고 했다. 모든 결정을 그녀가 혼자 내려야 했다. 몫돈을 마련해야 하는 것도, 무엇보다 집안의 모든 걱정과 염려가 오롯이 그녀 몫이었다.      

동면하는 곰처럼 반응없는 남편을 깨우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지친 삶에 몰려서였을까? 그녀는 자신의 스트레스를 남편을 향한 악다구니로 쏟아냈다고 했다. 아침에는 점심값이 없을까 용돈을 쥐어주고, 밤이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피곤한지 남편이 얼마나 무능한 남자인지를 독설로 바꾸어 퍼부었다. 아무리 험한 말을 뱉어도 남편은 변명을 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단다.   

   

어느 날 상가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지방으로 내려가야해서 이제 학원 다 정리해야 한다고, 남편이 마침내 지방국립대의 교수가 된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집을 보러 곧 내려갈거라고 했다. 하지만 기쁨의 시효는 딱 하루였다. 다음 날 남편의 전화가 왔단다. 거처할 집을 이미 구했고 그 집에는 혼자 내려간다고, 그러면서 남편이 덧붙인 말, 너무 지겨웠어.

얼마 후 K의 남편은 그녀가 이혼을 원하면 이혼을 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단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딱 하나뿐이란다. 혼자 사는 것!     

남편이 삶의 전부였을까? 남편이 떠난 후 K는 심지가 다 빠진 헝겊인형처럼 주저 앉았다. 얼마 후 그녀는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 곁으로 이사를 했다.    

  

K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 나는 곧 K의 그것을 찾아냈다. 남편의 꿈을 내 꿈으로 착각한 잘못,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고, 감당하려고 한 잘못!  

   


J는 착한 여자였다. J는 치매를 앓는 시부를 잘 모셔 시(市)에서 주는 효부상까지 받았다. 시부가 돌아가신 후 J의 남편은 그동안 고생했다며 그의 누나가 살고 있는 미국 여행을 ‘시켜주었고’, 그녀가 가고 싶어했던 대학의 실용음악과에도 ‘보내주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어느 날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남편과 지방에 내려가던 길에 고속도로 가까이 있는 친정을 지나쳤단다. 자신은 잠깐이라도 친정에 들러 부모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남편이 명절에 다녀왔으니 오늘은 안 간다며 바로 옆에 있는 친정을 그냥 지나치더란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내게서 그녀의 남편을 비난하는 소리가 나갔던 것 같다.

그녀가 내게 원한 것은 자신의 우울함에 대한 공감과 위로였을 것이다. ‘하늘 같은 남편’에 대한 비난은 그녀가 원했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올 때보다 더 어두운 얼굴이 되어 돌아갔다.

그것은 그녀가 착한 여자이기 때문일까...? 단지 앞 8차선 도로에 시에서 일렬로 화분을 놓아 중앙분리대를 만들었다. 그녀가 그녀답지 않게 그것을 비난했다. 나는 괜찮아 보이던데-하자, 남편이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했다고 했다.

 

J의 남편은, 선거를 해야 할 때면 누구를 찍으라고 일러주는 친절을 베풀고, 그녀가 운전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다가 마침내 ‘허락’하는 관대함도 베풀고, 그녀를 데리고 나가 옷도 선택해 주는 세심함도 베푸는 남자였다. 남자의 크고 단단한 우산 밑에서 그녀는 기꺼이 행복했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고 싶은데 남편이 허락해주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여자, 착한 여자의 모습은 그런 것일까...?   


   

그녀는 불쌍하지 않았다. 


 R은 재주가 많았다. 재주가 많은 만큼 이력도 다양해서 R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시간을 잊었다.

젊은 시절 R은 동대문의 포목상이었다. 포목상은 돈을 포대 자루에 담을 정도로 잘 되어서, 아침부터 눈코 뜰 쌔 없이 바빴다고 했다. 그렇게 바쁜 하루를 마감하고 나면 그녀에게는 늘 거르지 않는 일과가 있었다. 근처의 밥집과 술집을 돌면서 그 하루, 남편이 먹은 밥값과 술값을 계산하는 것이었단다.

아내의 돈으로 흥청망청 살던 남편이 과수원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자기 일을 갖게 되면 사람이 달라질거라 믿고 기꺼이 포목점을 접고 전재산을 들여 남편이 원하는 산을 샀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계획은 계획에서 그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R은 무일푼으로 산을 내려와야 했다. 그녀는 그 때도 남편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전히 남편이 변하기를 기다렸고 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녀는 친정언니 집으로, 치킨집 뒷방으로, 콘도 관리실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옮겨다니며 생활을 이어갔다. 남편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남편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단호했다. 남편이 눈물과 애원 때로는 협박으로 매달렸지만, 그녀는 결국 그 결혼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후,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산 그녀의 삶은 넉넉히 짐작이 되었다.   

   

남편이었던 남자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은 20년도 더 흐른 뒤였다. 드라마 공식이 현실을 따른 걸까?  남자는 만신창이의 몸이었다. 응급실에 누워있었단다. 급하게 수술을 한 남자의 곁을 아들이 지켰다. 아들은 20년만에 나타난 병든 아버지 곁을 지키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거나 지각을 하거나 결근을 하거나 했다. 그 아들 때문이었다고 했다. 남자를 집으로 들인 단 하나의 이유가. R은 남자에게 어떤 연민도 분노도 미움도 없다고 했다.

정기적으로 투석을 해야하는 남자를 집에 들이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남자가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면 남자를 내보거나, 그게 어려우면 자신이 집을 나오겠다고.

주위에서는 그녀의 계획에 그다지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부부 아닌 부부로 굳어질 것이라 여겼다. 한번 헤어지는 것도 어려운데 두 번씩 그렇게 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3년이 지나 남편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자 집을 정리했다. 두 사람은 그녀의 계획대로 각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아들들이 내심 헤어지지 말고 부모님이 계속 같이 살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누구의 뜻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의 삶은 진화하는가?      


무엇이 진화 혹은 발전인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삼종지도를 실천한 조선시대 여자들은 미개했고, 이 시대 본인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여자들은 발전하고 문명화한 것일까? 남편과 자식을 삶의 중심에 놓고 자신을 해체하며 산 여자들은 어리석고 자기본위의 삶을 산 여자들은 현명한 것일까?


회사에 소속돼 글을 쓰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자서전 서비스’라는 것을 진행하면서 연로하신 분들을 만났었다(의도하지 않았지만 주로 여성이었다.) 한국전쟁과 극심한 가난의 시대를 지난 그 분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삶을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고’ ‘몇 날 밤을 세워도 다 못할’ 이야기로 시작했다.

가난, 시집살이, 남편의 바람이 그 모든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었다. 자서전을 의뢰하는 분들은 대부분 성공한 자식을 두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당사자와 자식들 모두, 그 절절한 이야기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자부심의 깊이는 고생이 심할수록, 인내의 강도가 강할수록 더했다. 그들은 ‘고생 베틀’ 세대였다.     


지금의 50대 전후는 젠더나 패미니즘보다는 여성해방이라는 단어에 익숙한 세대다. 그들은 가난이나 ‘못 배움’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세대이니 ‘고생 베틀’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대신 그들은 우울증과 싸우고 있었다.

남편이 바람이 나서, 독립한 자식이 남 같이 느껴져서, 퇴직한 남편에게 세 끼 밥을 해주어야 해서, 몸이 예전같지 않아서 그녀들은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피차 우울증 진단을 내려주고, 더 깊은 나의 우울증을 이야기했다. ‘우울증 베틀’이었다.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세대를 달리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정서는 신기하게도 동일하다.

‘자기연민’과 ‘한탄’

끝없는 자기연민은 때로는 눈물과 감동으로 때로는 자부심으로도 나타난다. 자기연민과 한탄은 조선조 여류문인들의 작품에도 흔하게 나타난다. 그러고 보면 이 정서는 깊고도 오랜 정서임에 분명하다. 누군가는 여자를 둘러싼 사회구조적 환경으로 그 원인을 돌릴 것이다. 그것이 많은 부분 사실이기하지만, 자기연민과 한탄의 감정에 발목이 잡혀있는 한, 여자의 삶이 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여겨진다.      


가부장적인 남편을 참거나 바람난 남편을 참거나, 심지어 폭력을 일삼는 남편을 참아도,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내가 참은 것은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선택이었다. 선택에는 한탄이 아니라 책임으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내 삶은 내 선택의 연속이다. 때로는 피치못할 운명이었다 할지라도 나는 한탄이 아닌 책임으로 답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오롯이 나를 위해서다. ‘피해자 석’은 여자의 고정석이 아니다. 늘 피해자 석을 고집해 나를 항상 불쌍한 여자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기만 한다.      


R은 전남편과 살림을 분리하면서 불쌍한 여자로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한번도 불쌍한 여자였던 적이 없어, 마지막에 불쌍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아.

오랜 시간 R을 보았지만 R에게서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자신을 한탄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70이 가깝지만, 악세사리를 만들어 납품하고, 장애인활동지원사로 투잡을 하는 그녀는 여전히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당당한 여자다.

그녀를 응원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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