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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시현 Dec 25. 2021

check-in을 하는 딸의 등 뒤에서.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가 홀로 병원에 가시는 경우는 없게 하려고 무척 노력을 했다. 때때로 예약도 없는 병원을 아버지 혼자 가시려고도 했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든 자식 한 명은 아버지와 동행하고자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 혼자 병원에 가시는 때가 훨씬 더 긴 세월이었겠지만, 기억하는 건 일과 아이들과 같은 여러 사정으로 전전긍긍하면서도 병원에는 꼭 모시고 갔던 시간이다.

우리는 대형병원의 복잡하고 긴 수속을 아버지가 감당하기 어렵고, 의사와의 소통도 미덥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가 자식 한 명 없이 혼자 병원에 가는 처량한 노인네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식에게 의지해 병원에 가면서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이... 


문득문득 찾아오는 답답함과 때마침 시행된 ‘위드 코로나’로 모처럼 제주도 가족 여행을 결정했다. 약간의 걱정과 약간의 설렘으로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알아보는 나에게, 작년 말 학업을 마치고 이제 직장인 된 딸아이가 엄마 하지 마, 내가 할게, 했다.      


올여름, 막내를 데리고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야 했다. 검사소 앞의 줄이 길었다. 중간쯤 오자 검사소 기둥에 휴대폰으로 큐알코드를 찍어 사전 설문조사를 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을 보고 휴대폰을 열려는 순간, 보건소 조끼를 입은 중년 여자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내 휴대폰을 뺏어 뒤에 있는 아들에게 건네려고 했다. 나는 휴대폰에 힘을 주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학생들이 잘하니까 아들한테 주면 빨리 돼요.”

나는 반격하듯 여자에게 빠르게 말했다. 나도 빨리 잘해요.      

여자의 태도는 분명 어이없었지만, 나 역시 이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싶어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민망해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면서도 나는 결코 아들에게 내 휴대폰을 넘기지는 않았다.     

 

우리를 지나 뒤로 간 여자는 젊은 사람에게는 안내문을 보라고 하고,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휴대폰을 건네받아 큐알코드를 찍고 직접 링크를 열어주었다. 검사받으러 온 나이 든 사람들은 속절없이 자신의 휴대폰을 여자에게 건네줘야 했다. 하지만 링크가 열렸음에도 설문조사를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줄 밖으로 나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로 갔다. 그런 저런 이유로 줄은 계속 길어져 갔다.


여자의 마음이해가 되었다. 젊은 사람이 빠르게 잘한다는 말은 매 순간순간의 경험일 것이다. 검사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줄은 자꾸 길어지니 일하는 사람들은 속이 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엄마 하지 마, 하는 딸의 말이 휴대폰을 아들에게 넘기라고 하던 보건소 직원의 말과 묘하게 겹쳐졌다.      


엄마가 할게, 조금 우겨보았지만, 딸아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최적의 비행기 표와 숙소를 인터넷을 뒤져 고르는 것, 그것은 청소를 한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장을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내가 물러설 수밖에.... 더욱이 아이는 IT전문가다.

아이는 제주도 내 관광지를 몇 군데 묶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티켓까지 예약했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런 티켓이 있는지도 몰랐다.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후였지만 그대로 숙소로 들어가기는 아쉬웠다.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휴대폰을 열어 공항 근처, 밤에 가 볼만한 곳을 검색했다.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휴대폰을 열지 않았다. 아이가 내가 있을 때 굳이 밥상을 차리지 않는 것처럼.

가만히 보니 인터넷을 뒤져대는 속도는, 딸아이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고등학생인 막내가 제 누나보다 빠른 것 같았다. 인터넷의 세계는 젊을수록 더 호의적인가...?


인터넷이 바다라면 나 같은 사람은 그 바다의 얼마 큼이나 경험한 걸까? 또 그중의 얼마 큼을 알아야 이 세계에 낙오되지 않고 적응하는 걸까...?     

용두암에서 제주의 밤바다를 보고 숙소로 향했다. 호텔 정문 앞에 도착해 나와 아이들은 카트에 짐을 내리고 남편은 그대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귀여운 복장을 한 직원이 나와 카트를 밀어주어서 나는 핸드백만 들고 로비로 들어갔다.

어느 결에 갔는지 딸아이는 프런트 데스크 앞에 있었다. 아이가 예약한 호텔이니 아이가 체크인을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뒷모습에서도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코로나 탓에 체크인을 하는 데에도 확인할 것이 많은 지 아이와 컨시어지의 대화가 길어졌다.      


내 눈에 아직도 어리기만 한 아이가 언제 커버렸는지 호텔에서 체크인을 한다. 뿌듯한 걸까..? 나는 뿌듯한가?


이제까지는 아이가 서 있는 저 자리에 나나 남편이 있었다. 아이의 자리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였다. 저 자리에 서서 체크인을 하면서 언제가 이 위치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언젠가 위치가 바뀔 때 어떤 마음, 혹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한 게 없다. 정확히는 준비한 게 없다.

마주해보니, 이것은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낡은 서랍장 하나 없는 빈 방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분명 잘 자라 준 아이가 대견하고 고마웠지만, 이 서늘함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제 내 앞에 있는 시간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간임에 분명하다.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보다 내가 아이들을 필요로 할 때가 더 많아질 테고, 결정할 일은 적어지고 기다리는 시간은 많아질 테고, 나의 자유는 여러 부분에서 제약될 테고, 집 밖에서는 보건소의 조끼 입은 직원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날 테고, 그리고 마침내 홀로 병원행이 몹시 미덥지 않은 ‘아버지의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 시간 나의 사유도 줄어들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지구 상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걸어갔고, 앞으로도 걸어갈 길이지만 익숙한 사람은 없는 길, 육체와 지력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긋날 그 길은 들어서기 전에 단단한 준비가 필요해 보였다.      


우선은 나를 도와주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 그 도움의 손길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결정권이 없음도 받아들이고, 거기에 분노해서는 안 되고, 타인의 결정이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그런 것에 대한 욕구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고집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맺히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분명 그 시간이 태산처럼 내 앞에 놓이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인간 태고의 겸손이 회복되는 시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까지 가져보지 못한 겸손은 핸드폰을 아들에게 건네라는 여자의 말에 불쾌해하지 않고, 직원들을 위하여 선선히 핸드폰을 건넬 만큼 유순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겠다.      


엄마 올라가자, 카드키를 쥔 손으로 내 팔을 끄며 아이가 말했다.  

나는 선선히 아이가 끄는 대로 따라갔다.      


젊어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순수한 겸손의 모습, 나의 노년이 그러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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