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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시저장 Jan 12. 2023

마법 같은 이야기가 담긴 어른을 위한 동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생각과는 달랐다. 목요일 오후이긴 했지만 적당히 붐빌 줄 알았다. 이렇게 오랜만에 새로운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니, 당연히 그 시절을 함께 했던 그들이 모두 영화관으로 쏟아져 나올 줄만 알았다. 내가 찾은 영화관이 유달리 관객이 없는 곳이어서 그런 걸까. 십수년 만에 다시 만난 <슬램덩크>는 생각보단 한산했다.

    시작은 신선했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시작한 첫 장면은 앞으로 펼쳐질 내용이 무엇일지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농구가 인생의 전부인 것만 같은 형제가 우애 좋게 공을 던지며 놀았고, 빠른 호흡으로 어린 사내 아이의 곡절을 그려갔다. 그 곡절을 담아낸 2개의 손목 보호대가 익숙한 누군가가 되고, 정말 송태섭이 맞나 싶었을 때 더 익숙한 누군가의 펜스케치가 이어졌다. 새로운 이야기가 익숙한 이야기와 절묘하게 만나는 이 장면은 색 바랜 추억을 깔끔하게 덧칠해냈다.

    곧이어 곱게 색이 입혀진 추억이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국지의 '오호대장군'만큼이나 나의 유년기를 뜨겁게 했던 '북산 오형제'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스케치북의 드로잉이 애니메이션이 돼서 살아움직이고, 흑백의 움직임에 컬러가, 그것도 고화질로 입혀지는 장면은 더욱 가슴을 뜨겁게 했다. 영화의 중반 쯤에 가서는 단 하나의 비어있는 픽셀을 허용하지 않는 색들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과거의 추억이 현재의 기술력으로 되살아났던 첫 장면은 분명히 압도적이었고,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이야기의 전개와 경계도 아주 적당했다. 북산과 산왕전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각 인물들의 사연을 풀어내는 전개는 두 시간 안에 모든 이야기를 풀었다가 담아낼 수 있는 절묘한 수였던 것 같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거나 반대로 과거를 지지부진하게 나열하는 전개였다면 이도저도 아닌 채 끝나버리고 말았을 터다. 작가의 고민이 잘 느껴졌고, 무엇보다 나의 추억을 잘 지켜줘서 고마웠다. 어떤 식으로든 '우려 먹는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지금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안 본 눈 삽니다.'로 도배될 뻔했다.

    <슬램덩크>의 명성을 이제야 듣고, 어떤 이야기인지 들어보고자 했던 '뉴비'들에게는 불친절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두 시간 안에 '오형제'의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다 보니 맥락들이 생략돼있었기 때문인데, 과거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늙은이로서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잊고 있던 디테일들이 하나둘씩 살아나면서 더 재미있어졌다. 기존의 이야기에는 없었던 송태섭의 서사가 더해지면서 새로움마저 느낄 수 있었으니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물론 서사는 단조로웠다. 찢기고, 짓밟히고, 더럽혀졌던 각 인물들의 과거를 보여주고, 그 과거가 동력이 돼서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서사가 한두 명도 아니고, 모든 인물을 거쳐가는 방식은 딱 세 번째까지만 받아들일만 했다. 게임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고난의 서사가 펼쳐지고, 단 한명도 빠짐없이 불행으로 빠트린 뒤 역전의 쾌감을 던지는 방식이 반복되는 게 약간은 지루하기도 했다.

    우연은 너무 지나쳤고, 이야기는 끝도 없이 극적이었다. 개연성이라는 말을 꺼내들기도 민망하게 단 하나의 게임에 모든 인물들이 각성했고, 십수년을 농구에만 올인했던 산왕의 엘리트들이 여기저기 떠돌다 이제야 겨우 정신차린 북산의 뜨내기들에게 역전을 허용했다. 무려 20점 차이가 넘게 이기고 있던 경기를 힘없이 내주고 만 이 이야기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쏴도 쏴도 마르지 않는 탄창마냥 끊임없이 에너지를 끌어내는 주인공들은 '저런 게 어딨어?'라는 비난을 듣기에 손색이 없었다. 팍팍한 현실에 닳고 닳은 중년 따위는 이 이야기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슬램덩크>니까 가능하더라. 말도 안 되는 그 이야기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지금 영화관에서 <슬램덩크>를 보고 있는 것은 40줄에 걸린 내가 아니었다. 불꽃슛을 쏘는 피구왕 통키를 선망하고, 어떻게든 독수리슛을 쏴보려고 해가 질 때까지 연습했던, 제발 좀 거들기만 하라며 수도 없이 왼손을 나무랐던 그날의 내가 앉아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단조로운 서사와 개연성 따윈 내던져버린 그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전율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모든 갈등이 마법 같이 녹아 없어지는 모습이었다. 진짜 수도 없이 갈등이 던져졌지만, 그 모든 갈등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사라졌다. 평소의 나라면 웃기고 있다며 콧방귀를 뀌었겠지만 이미 나는 한 손엔 농구공을 들고, 다른 손엔 만화책을 들고 있던 그날의 찐따로 돌아가있었기 때문에 그 어떤 갈등도 마법처럼 사라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비온 뒤의 땅이 굳'는 장면이 벅차게 다가와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엔 갈등이 사라질 수 있다고 믿게 해준 데대한 고마움도 꽤 많이 녹아있었다.

    한때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던 흐름이 있었다. 현실에 지친 어른들도 동심으로 돌아가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 꽤 많은 작품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중 어떤 것도 성공하진 못했던 것 같다. 현실에 찌든 늙은이들의 동심을 되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가 성공할 수 없었던 건, 이미 우리가 그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잊고 있던 나의 동심은 서태웅과 강백호의 가슴 뜨거운 하이파이브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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