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멍게 Oct 09. 2022

2010년, 외로웠던 나의 '여덕질'에 부치는 편지

내가 사랑했던 모든 여자아이돌들, 그리고 여덕들에게

K-덕질문화의 짧고 깊은 생애를 아울러, '여자' '아이돌'은 대중문화에 별 관심이 없다는 사람들에게도 늘 화두의 대상이었다.


몇 년의 계보를 거쳐온 팬문화의 역사에 따라 모습이야 달라졌지만, 노래실력, 무대실수, 태도논란, 열애설, 자연스러운 외적 변화 하나하나까지, 놀랍게도 '전보단 나아졌다'고 평해지는 여자아이돌을 향한 높은 잣대의 유형은 여전하다. 그런데, 여기서 '전보다 나아졌다'라 함은... 도대체 이 꼬라지가 이전에는 어떤 꼴이었다는 걸까? '드림콘서트 텐미닛'따위의 사건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돌들의 지난 여정이 얼마나 다사다난하였는지 가히 큰 공감을 하리라.


그렇게 지난한 몇 년을 거쳐, 언니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반 정도 사라진 OPPA들을 뒤로 하고, 언니들은 대중의 유독 엄격한 잣대 앞에서도 여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는 늘 그랬듯 이젠 파급력이 없다느니, 나이가 들었다느니... 따위의 참으로 특색있는 꼬투리를 잡았지만, 그닥 의미없을 성적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저 우리의 언니들이 살아있다는게 훨씬 소중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던진 돌을 이겨낸 스타에게 박수를 쳤고,

그 박수 사이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나의 언니가 있었다.


2022년, 내 덕질은 아직도 외로웠다.




여자아이돌을 좋아하는게 별종 취급받는 시절이 있었다.


중학생 시절, 또래 여자친구들 대다수가 남자아이돌을 좋아하는 동안, 여자아이돌 중에서도 유독 이상하게 미움받던 아이돌을 좋아하는 나는 쉽게 '덕질 토크'에 낄 수 없었다. 지금보다 여자아이돌의 입지가 낮았던 시절, 여돌은 OPPA와 언제 엮일지 모르는 골칫덩이였다. 심지어는 모 남자아이돌이 먼저 SNS에 '노골적인 연애정황'을 시작했다고 해도, 그 죄의 원인은 나의 언니에게 있었다. 분명 해당 아이돌보다 높은 커리어를 쌓았던 내 언니였음에도, OO이 아깝다, 노래 실력도 없는 애랑 왜 사귀냐(!)는 포털 댓글까지 보고 난 후(도무지 어디서부터 문제를 제기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종종 억울해서 열이 올랐지만 차마 나의 신분(?)을 밝히고 다수의 친구들과 대립할 수는 없었다. 그 시절, 여중에서 여돌을 좋아한다는 것은 가히 레지스탕스였다.


덕질로 친해져 자연스레 취향을 터놓게 되었던, 나름 오픈마인드였던 내 친구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그런데 여돌을 좋아하는건 어떤 느낌이야? 남돌 좋아하는거랑 달라?"


별로 다르지 않아. 분명 그렇게 생각했지만, 남돌과 여돌을 좋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는 것도 같았다. 어렸던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들의 사회적인 입지, 소비방식은 마냥 똑같다 할 수 없었다. 그치만 내가 여자아이돌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도 자세히 설명할 방도가 없어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세일러문 좋아해봤어? 그런 느낌이야."


그렇다. 그들은 내게 세일러문, 같은 것이었다. 닮고싶다고는 차마 못하겠지만, 어린 나이에 피땀흘려 역경을 이겨내고, 그랬기에 자신의 일을 더없이 사랑하고 노력하며, 때로 어설퍼보여도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하고 싶다는 그들의 이야기가 내게 소중했다.


그렇게 소중했기에 내 덕질의 시절을 다시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홧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노력하며 살았을 뿐인데 어째서, 수많은 키보드 전장 속에서 가십거리가 되어야만 했을까? 서울에는 갈 엄두도 못내던, 키보드 배틀에 약했던 무력한 중학생이었던 내 자신이 미웠다.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어 '팬북 총공'에 열심히 손으로 편지를 눌러썼던 기억이 선하다. 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자주 슬펐다. 언니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단단했고, 프로였겠지만, 동시에 아팠다. 그런 사람에게 가해지는 돌팔매를 조금이나마 옅게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또다른 연예인들을 좋아하게 되어가던 어느날, 친구에게 전화로 내 언니의 소식을 들었을 때, 더 할 말 없이 슬펐다. 그가 지나온 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으니까.





2022년, 여자아이돌을 좋아하는 일은 더 이상 별종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자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일 자체에는 여전히 루키즘, 마름 선망, 대상화, 청소년노동, ...과 같은 복잡한 혼종성이 가득하다. 어떤 노래 가사와 같이 사랑은 자해고, 특히나 이 사랑은 어쩌면 거대한 산업구조에 짓는 죄다.


여전히 아이돌을 좋아하는 성인으로 자라, 처음으로 나의 언니가 참여한 영화 시사회를 보러 갔다. 돌아오지 못하는 언니와 함께 데뷔했던 막내, 여전히 20대인 어린 언니를 보았다. 언니들을 좋아했을 때 내가 성인이었다면 조금이나마 더 할 수 있는게 있었을까. 지금 그들이 활동했다면 더 나았을까, 어쩌면 여자아이돌이라는 문화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죄책감과 그리움과 반가움의 복잡한 마음 사이로, 내가 마주한 것은 한 무리의 여덕들이었다.


여전히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즐거워보였고, 어딘가 결연해보이기도 했고, 능숙하게 덕질템을 공유하고 있었고, 한결같았다. 문득 궁금했다. 외로웠던 덕질의 시기를 지나며 우리들은 어떻게 자라났을까, 이러한 죄책감과 애정과 환멸을 공유하던 그 때 그 '여덕'들은 이제,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식으로 그리워하고 어딘가에서 일하는 여자가 되어있을까.


2022년, 내 덕질을 더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어쩌면 지금의 K팝을 더 낫게 만든 여덕사(史)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빛나는 추억이라기엔 너무나 '빡치고', 우울했다기엔 너무나 많은 의리로 똘똘 뭉쳐 있었던

우리가 여덕으로 존재하던 그 시절을, 단순히 한많은 시절보다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것은, 조금 나이차가 나는 어린 언니들에게 한눈에 반했단 이유로

그들의 삶을 더없이 사랑하고 지키려 하고 아파했던 우리들의 치열한 투쟁의 기록이라고.

작가의 이전글 예술 전공을 회사에 뽑아놨더니 생긴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