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뉴욕 아파트에는 북향의 창문이 두 개 있다. 남향의 창문이 오랫동안 밝은 햇살을 주는 데에 반해 북향의 창문은 직사광선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유독 금빛의 햇살이 두 눈에 가득 담겼다. 태양이 주는 선물일까? 마침 오늘은 내가 태어난 지 31년이 된 날이다.
코비드의 영향으로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지면서 좀 더 규칙적으로 생활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센트럴 파크가 없었다면 외로운 고립 생활에 나는 아마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을 수도 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편한 신발을 신고서 공원으로 향했다.
아침의 공원은 부지런히 먹이를 찾는 동물들의 사부작 거리는 발걸음 소리, 수다스러운 참새들의 지저귐 소리로 생기가 넘친다. 눈에 띄게 살이 토실토실 오른 청설모들은 겨울이 코앞에 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지난봄 수줍게 고개를 내밀던 초록의 이파리들이 어느새 노란빛으로 무르익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아름다운 센트럴 파크이지만, 단풍이 아름답게 수 놓인 11월을 나는 제일 좋아한다. 제 숙명을 다한 잎사귀들은 산들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져 산책길을 빼곡히 채운다. 유독 눈에 띄는 단풍잎 두 개를 주어서 일기장 사이에 끼워두었다.
떨어진 낙엽은 겨우 내 땅을 따뜻이 보온해 주고, 청설모와 참새들의 배설물은 새로운 씨앗을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 하나도 허투루 쓰이는 것이 없는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다.
‘나는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을 던지던 무렵, 아우 슈피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쓴 ‘Man’s Searh For Meaning’이라는 책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It did not really matter what we expected from life, but rather what life expected from us. We needed to stop asking about the meaning of life, and instead to think of ourselves as those who were being questioned by life - daily and hourly.
당장 가스 오븐에 들어갈 처지의 사람들도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살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쳤다. 어쩌면 어떤 역경이 닥치던 있는 힘을 다해 하루를 살아 내는 것 자체가 우리가 타고난 의무인지도 모른다.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후회 없이 살아내고, 떨어진 순간에는 무심하게 생을 마감하는 낙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