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 끝, 그리고
2020년 11월 3일
오늘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날이다. 다행히 집 바로 앞에 투표장이 있어서, 일어나자마자 재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에 벌써부터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서 있었다. ‘Happy Voting!’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건물은 투표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마스크 너머로 희망의 에너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투표를 마치고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입구에 늘어진 예쁜 꽃밭에서 참새들이 아침식사에 한창인 것이 귀여워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말을 건다. ‘꽃이 참 예쁘죠?’ 코비드가 시작되고서 모르는 누군가와 말을 섞어본 게 아마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로베르토는 올해 72살이 되었는데, 오늘 투표가 생전 처음 투표란다. 그동안 왜 투표를 하지 않은 것이냐 물으니, 당신의 한 표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단다. 그럼 왜 오늘은 투표를 한 것이냐 물으니, 그는 ‘이번엔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꼭 당선되기를 바라서요.’라고 이야기했다. 모두가 한 마음인 것이 느껴졌다.
2020년 11월 7일
바이든이 당선되던 날, 뉴욕 전체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악당을 물리쳤으니 이제 드디어 해피엔딩을 맞이할 일 만 남은 것인가?
2021년 3월 10일
오랜만에 여러 명의 친구들이 모이는 점심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콜로라도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비드 테스트를 받아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받는 코비드 검사였다. 미국 병원료와 보험에 대한 불신감이 꽤나 높아서, 코비드 테스트가 보험처리가 되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서 병원에 도착했다. 검사는 생각보다 간단했고, Rapid 검사였기에 음성 진단이 바로 나왔다.
며 칠 후 날아온 청구서에 뒷목을 잡기까지, 잠시나마 미국 의료 시스템이 생각보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코비드 검사비가 150불, Urgent care 방문 비용이 350불, 총 500불이 청구되었다. 다행히(?) 보험사가 일부 금액을 부담하여 내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252불이 되신단다.
보험회사에 전화해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니 (따지로 나니) 무언가 착오가 있었고, 이 금액은 100% 보험사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니 깊은 화남이 몰려왔다. 이거 내가 전화 안 했으면 그대로 눈퉁이 맞을 뻔했네, 괘씸한 마음이 더해졌다.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의료도 일종의 서비스 상품인데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동안 가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물건을 구매할 때 가격표부터 보는 게 정상 아닌가? 이게 무슨 중국집에서 손대는 순간 돈 내게 하는 땅콩도 아니고 말이야.
2021년 3월 18일
소셜미디어가 새로운 해시태그로 넘쳐났다 - #StopAsianHatred. 아시안을 상대로 한 폭력 범죄가 길가의 노인을 공격하는 것을 넘어, 8명을 살해한 총격 범죄로 이어졌다. 부디 그들의 영혼이 고통에서 구원받을 수 있길, 남은 가족들의 마음에 슬픔과 상처가 너무 오래 머물지 않기를. 정신이 위태로운 개인이 총기를 구입하고, 범죄를 계획하고, 서슴없이 실행에 옮기는 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미국의 어두운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021년 4월 1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안면이 있었던 지인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의 나이 40살이었다. ‘황망한 마음에 널리 소식을 전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날아온 부고의 메시지에서 남은 가족들의 상처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빈 손으로 떠난다. 그 손에 얼마나 많은 금은보화를 움켜쥐었는지는 그저 한 밤의 꿈과 다름이 없다. 이 삶이 얼마나 짧은지, 얼마나 아까운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우리는 잊고 산다.
2021년 4월 2일
지난 화요일 부로 미국에 사는 성인은 모두 백신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PC방에서 수강신청을 클리어하던 광클의 실력이 다시 빛을 발휘해, 모더나 1차를 접종하게 되었다. 백신의 개발과 함께 사그라지던 미국 경제에 다시 희망의 불씨가 붙고 증권시장도 연일 상승세를 지속한다.
하지만 미디어로 본 미국은 여전히 사람들은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누어 서로를 공격하기에 바쁘다. 마스크를 쓰는 사람과 쓰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 백신을 믿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 총기 소유 법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 백신은 멍들어버린 우리의 마음까지도 치유할 수 있을까?
2021년 6월 4일
작년에 이직한 회사가 판데믹 이후 쭉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터라 나는 동료들을 한 번도 실물로 만난 적이 없다. 모두가 백신을 맞았으니 이제는 서로 만날 때가 되었다고, 경영진이 야심차게 팀 나들이를 준비했다. 예정에 없던 비 예보에 계획을 좀 변경하여 보트 파티 대신 첼시에 있는 호텔 야외 바에서 만나게 되었다.
2D 스크린으로 보던 이들을 3D로 만나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A는 생각보다 키가 되게 크네, B는 생각보다 되게 왜소하구나, C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데 - 일할 때 조금 삐걱거렸던 친구들도 얼굴을 보고 얘기하니 쌓였던 앙금이 스르르 녹았다. 출퇴근 시간을 아낄 수 있고 편안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나는 재택근무를 찬양하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깊이는 역시 스크린을 통해 쌓기에는 역부족인가 보다.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없었고, 빈 잔은 빗물로 다시 채워지고 다시 비워지기를 반복했다.
2021년 7월 2일
4th of July 휴가를 앞둔 금요일, 휴가객으로 꽉 찬 JFK공항은 새로운 돌연변이 Delta가 등장했다는 기사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제 정말 판데믹이 끝이 난 걸까, 혹은 종말을 앞둔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불꽃같은 자유일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아직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1년 9월 1일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 지 3개월이 넘었다. 판데믹 이전보다 올라간 가격은 둘째 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이들과 새로 이사 온 이들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오픈 하우스를 가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혹시 내가 여자고 동양인이라 차별을 받는 것인가 싶었지만 남자 친구도 딱히 더 나은 실정이 아닌 것을 보면 내 문제는 아닌가 보다. 넘쳐나는 사람들과 올라가는 물가가 달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제 정말 끝이 보이는 것 같다.
2021년 12월 1일
새로운 돌연변이가 (또) 발견되었다. 연말에 계획되어있는 한국 방문 여행이 2주 남짓 남은 시점인데,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볼멘소리와 함께 입을 한껏 내민다. 역시나, 백신 접종을 대상으로 완화되었던 격리 면제가 당분간 중단되었다는 뉴스 기사가 나왔다. 그래, 격리 까짓 거 하면 되지- 3년 반 만에 손녀딸 볼 생각에 들뜬 할머니 할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2021년 12월 13일
상황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지난주 있었던 회사 워크숍과 송년파티 이후 감기 증상을 보이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점심시간, 누군가 회사 메신저에 코비드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침에 일어나기 유독 어려웠던 게, 숙취로 인한 두통이 유독 오래간다고 생각했던 게, 어쩌면 코비드의 증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길 바란다.
2021년 12월 14일
미열이 지속되고, 지난밤 시작된 기침의 빈도가 점점 늘어났다. 3명의 동료들이 추가 확진 판정을 받았다. 집 근처 임시 테스트 시설에서 PCR 검사를 받으면서도 ‘설마, 그래도 아니겠지. 백신에 부스터까지 맞았는데.’ 코비드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이대로 한국 여행을 강행하는 게 맞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쉽지만, 멈추라는 신호가 왔을 땐 멈추는 게 좋겠다.’
대한항공에선 아무 까닭도 묻지 않고 바로 환불 처리를 해주었다.
2021년 12월 17일
간밤에 드디어 검사 결과가 나왔다. 양성이란다. 코비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이후 수백 번의 밤을 지내면서, 나날이 늘어가는 감염자 차트를 보면서도, 내가 코비드에 걸릴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어리니까, 나는 건강하니까, 나는 김치 파워가 있으니까- 사람이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죽음이 나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나는 눈먼 장님을 자청했다.
확진자에 관련된 부정적인 한국 뉴스를 많이 본 탓일까, 보이지 않는 낙인이 찍힌 것 마냥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진행될 질병 자체에 대한 걱정보다도, 바이러스의 보균자로써의 나, 잠정적인 전파자로써의 나,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 볼 사람들에 대한 시선에 더 신경이 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이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었고, 나 이전에 같은 고민을 했을 수많은 확진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도 가족과 친구들의 진심 어린 걱정과 위로는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 치료와 회복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바이러스는 우리 안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낸 동시에 스스로를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선한 모습도 동시에 보여준다.
2021년 12월 19일
크라상이 원래 향이 안나는 빵이었나? 오랜만에 마신 커피는 흙탕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아끼는 조 말론 향초를 열어서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쉬어 보았으나 희미한 꽃향기가 내 코에서 나는 것인지 뇌에 기억된 냄새가 재생되는 것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월요일에 처음으로 코비드 증상이 나타났으니 오늘이 7일째 되는 날이다. 초반엔 가벼운 감기 정도의 증상이 지속되었고, 며 칠 전부터는 숨이 조금 가빠지더니 오늘은 후각에 문제가 생겼다. 혹시나 상태가 더 나빠질 것을 대비해 혈액 산소 측정기와 체온계를 주문했고, 가까운 병원의 위치를 미리 파악 해 두었다. 5분 진료비가 350불이었는데, 입원하면 대체 얼마가 청구될까? 궁금해 찾아보니 하루에 고작 천만 원 이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회복을 해야 겠구나.
2021년 12월 22일
다행히 대부분의 증상이 미미해졌다. 산소농도와 체온 모두 정상 수준이다. 희미하게나마 다시 느껴지는 커피의 향기가 여간 반가울 수 없다. 따스한 햇살이 방을 가득 채운다.
변화는 언제든 찾아온다. 건강의 변화, 감정의 변화, 경제의 변화, 바이러스의 변화 - 변화가 찾아올 때면 우리는 당황해하며 묻는다,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나이까’ - 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영원함을 약속한 적이 없다. 그저 안정됨을 추구하는 우리의 본능이 영원함이 있다고 믿었을 뿐이다.
코비드로 인해 우리는 많은 변화를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냈다. 사상 최단기간의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그러하고, 기업들의 원격 근무 시스템 구축의 노력이 그러하고, 미워하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용서의 손길을 내미는 당신이 그러하다. 앞으로 그 어떤 역경이 올지라도 우리는 결국 헤쳐나갈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