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이야기에는 국경이 없다. 우리들의 고민은 사용하는 언어나 생김새보다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발전 단계에 있느냐와 더 관련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40년대에 발행된 생택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가 30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인 호평을 받은 것도, 한국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상 시상식을 휩쓸었던 것도 이 맥락으로 보면 이해가 간다.
얼마 전 처음으로 노르웨이 영화가 참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장황한 말을 늘어놓았다. 자막이 없이는 단 한 문장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화는 그동안 봤던 수많은 한국이나 미국 영화보다 깊은 여운을 남겼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일기장에 기록할지언정 친한 친구에게조차 털어놓기 어려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담담하고 아름답게 풀어냈다.
이야기가 다루는 내용은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 진로, 출산, 그리고 사랑.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진로 고민은 대체 언제 멈추게 될까?
주인공 줄리에는 대학 진학 후 몇 번이나 진로를 바꾼다. 공부를 잘해 의대에 진학했지만 ‘적성’ 이 맞지 않아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졸업 후엔 공부에 ‘적성’이 맞지 않아 사진 찍기를 시작한다. 그러다 우연히 온라인에서 쓴 글이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을 받아 글쓰기가 ‘적성’에 맞는다는 것을 깨닫고 작가 지망생이 된다.
학창 시절 나도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다. 차라리 한 과목을 100점 받고 나머지 과목을 죽을 쑤면 진로선택이 수월할 텐데, 대부분의 과목에서 80~90점을 받는 스타일이라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수학 점수가 잘 나오는데 미술도 재미있고, 과학이 재미있긴 한데 공대는 가기 싫고.. 차라리 누군가가 ‘너는 이걸 하면 성공할 테니 이길로 가게나’라고 말해주길 기대하며 적성검사를 몇 번이나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나의 적성만큼 그 경계가 애매모호한 의류학과에 진학했고, 한 우물만 파라는 주변의 조언에도 복수전공에 부전공까지 하며 대학에서 뭘 배운 건지 애매한 상황으로 졸업을 했다. 좋아하는 게 없었던 건 아닌데,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적성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아 틈이 날 때면 ‘직장 및 사업’ 운세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다.
예전에 즐겨보던 개그콘서트에 ‘달인’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수 십 년간 한 가지 일을 반복하고 달인이 된 사람들을 취재하는 형식의 코너였는데, 대부분의 달인들이 엉터리 달인으로 탄로 나 웃음을 자아낸다. 찾아보니 이 코너가 개그콘서트의 최장수 코너라고 한다. 김병만 특유의 재치와 몸개그로 재미가 있기도 했다만, 그뿐 아니라 그의 개그가 한 우물만 판 달인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더 성공한 것은 아니다는 위안을 주어서인지도 모른다.
줄리에가 계속해서 도전하고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보고 비슷한 맥락으로 위안을 받았다. 적성이라는 건 어쩌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 아닐까.
아이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최근 통계를 보면 한국의 경우 출산율이 한 명이 채 되지 않고 , 미국의 경우 55세 이상의 성인남녀 6명 중 1명은 자녀가 없다. 그리고 임신한 여성 중 10명 중 4명이 자연 유산을 경험한다고 한다. 감독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현실을 잘 담아냈다.
줄리에의 남자 친구 액셀은 성공한 만화가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것 - 하지만 줄리에는 자신이 없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닌데, 지금 그녀의 삶에 아이가 생기는 것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아이들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에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도 한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녀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나타난다고 해서 없던 모성애가 갑자기 샘솟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지만 (노르웨이는 임신중절 수술이 합법인 나라 중 하나다), 결국 자연 유산되면서 우리는 줄리에가 엄마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서른이 넘어 아직까지 아이가 없는 주변의 지인들을 보면 보면 보통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 사람, 원하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사람,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를 갈팡질팡하는 내가 있다. 줄리에의 삶이 자연스러웠듯 아이가 없는 삶 또한 자연스러울 수 있다.
결국 누가 최악인가?
I do love you, but I don’t love you.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의 제목은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한국 제목은 영화의 핵심을 제대로 놓친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라는 직역이 차라리 나았을 뻔했다. 제목과는 다르게 결국 아무도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이 영화의 교훈인데, 한국의 제목대로면 모두가 최악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보통의 로맨스물은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 주목하고, 결혼하는 순간 종이 울리며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그 연애 초반의 꿀 떨어지는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지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2시간 남짓 한 영화 상영 시간 안에, 여러 번의 이별이 등장한다. 주인공 줄리에와 액셀의 이별, 줄리에와 사랑에 빠진 엘빈과 그의 전 여자 친구 수니바의 이별, 줄리에와 엘빈의 이별, 그리고 다시 줄리에와 액셀의 이별.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이별도 피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만남도 이별도 지극히 자연스럽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수만 년 전 이미 ‘우주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라는 진언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체 왜 변하는 것이냐며 울부짖는다.
완전한 직업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다. 영화는 우리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을 보여주지만, 허무주의가 아니다.아름답고 완전한 도착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딘가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출처
https://www.census.gov/newsroom/press-releases/2021/childless-older-adult-populatio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