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내가 다니던 곳은 일 년에 15일의 휴가가 있었다. 그중 5일은 친구들과 떠나는 여름휴가에, 5일은 병원을 가거나 은행업무를 보는 데, 그리고 남은 5일은 도저히 출근하기 싫은 월요일을 위한 비장의 카드로 사용되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바빴고, 가족여행은 '다음에 가면 되지 뭐'라는 이유로 항상 우선순위 저 밖에 있었다.
출국 전 엄마와의 여행을 계획하게 된 것은 그동안 쌓인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우리 제주도에 둘이 놀러 갈까?' 했을 때 엄마는 언제 갈 건지, 왜 제주도인지, 왜 아빠를 빼고 둘이 가자는 것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래'라고 답했다.
퇴사를 하겠다고, 언니가 먼저 떠난 미국에 나도 가서 살아보겠다고 말하던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래, 잘 결정했다' 라고 말한 것처럼.
일요일에 출발하여 화요일에 돌아오기로 우선 날을 정하고, 비행기표를 구매하고, 숙소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했다. 그렇게 2년 전 성수기가 막 지난 9월 첫 주, 처음으로 둘만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김포공항에서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제주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길가에 난 풀 잎 조차도 메이드 인 제주라는 이유로 더 예뻐 보인다. 비행기로 30분 거리에, 비자 없이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이런 아름다운 섬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해 둔 렌터카를 찾아, 엄마가 운전대를 잡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성산 일출봉.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성산 일출봉 근처였다.
성산 일출봉은 제주도의 필수 관광 코스로, 나 역시도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렸다. 그런데 엄마가 색다른 제안을 했다. 성산 일출봉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성산 일출봉은 또 아니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성산 일출봉에서 몇 분 떨어진 곳이었는데, 정말로 성산 일출봉을 성산 일출봉에서보다 훨씬 더 잘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힘들게 오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성산일출봉을 더 아름답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언덕 오르기에 바빠 내가 오르고 있는 게 얼마나 멋진 곳임을 즐길 겨를이 없었다. 엄마 덕분에 진정한 성산 일출봉의 장관을 처음으로 눈에 담았다.
나무에 오르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그 나무를 둘러싼 숲의 아름다움을 평생 알 수 없듯이, 한 발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볼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국에 있을 땐, 부모님과 같이 살 땐, 매일 당연한 출근을 할 땐 몰랐던 순간의 가치와 소중함을, 2년간 떨어져 지낸 지금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듯이.
우리가 삼일 동안 묵은 곳은 금오름 근처에 있는 새로 공사를 마친 나무로 지어진 집이었다. 이 층으로 된 그 집은 크지는 않았지만 알차게 공간 활용도가 좋았고, 집 안에서 나는 은은한 나무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아직 개발이 많이 되어 있지 않은 동네라, 창문 밖으론 흔들리는 풀잎 외엔 아무것도 없다는 점도 좋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면 싱글 사이즈의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엄마와 같은 방에서 나란히 잠을 자는 게 참 오랜만이다.
다음날 아침, 예보에 없었던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딱히 정해놓은 일정이 없던지라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환상숲 곶자왈이라는 곳이 적당해 보여 그곳으로 향했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제주어 ‘곶’과 가시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제주 고유어로, 쉬운 말로 정글 숲 정도가 되겠다. 이 곳은 해설 시간에 맞춰 가이드와 동행해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아무래도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곳이라,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쉽게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서일까? 아침에 내린 비 덕분에 숲은 더 푸르고 신비로웠다.
용암이 굳어 돌이 되고, 그 돌을 감싸는 이끼가 생기고, 돌 틈 사이로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를 타고 덩굴이 자라 지금의 정글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렸을까. 그에 비해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무는 세월은 얼마나 짧은 순간일까.
숲 산책을 마치고 우리가 찾은 곳은 본태박물관이다. 사실 이전에 친구들과 한 번 왔다가 인당 2만 원이라는 생각보다 비싼 입장료에 발걸음을 돌렸었다. 엄마 몫 까지 4만 원을 내는데도 이번엔 이상하게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태박물관은 건물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오로라가 느껴지는데, 타다오 안도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곳이란다.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곳곳에서 들어오는 빛, 그리고 흐르거나 고여있는 물을 마치 예술 작품처럼 활용한 것이 인상 깊다. 총 5개의 전시관이 있는데, 이 자리에 배치되기까지 수많은 경쟁을 뚫었을 것만 같은, 정말 멋진 작품 들만 골라 있었다. 전통미술과 공예품, 백남준의 작품을 포함한 컨템퍼러리전, 그리고 인스타 사진으로 유명한 (환 공포증 주의) 쿠사미 야오이의 작품전.
굳은 표정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엄마의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그저 심각한 척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심오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엄마는 웃으며 '참 좋다'라고 했다. 작품이 좋다는 것 인지, 나와 여행을 온 것이 좋다는 것 인지, 아마 둘 다이겠지.
엄마와 마지막으로 전시를 보러 온 적이 언제이더라 - 어려서는 집 근처에 있는 예술의 전당을 곧장 잘 갔었는데. 언니와 내가 미술관을 특히나 좋아하는 건 어려서부터 엄마와 미술관에 많이 다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핏덩이로 태어나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엄마에게 받은 물질적 정신적인 도움은 항하의 모래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망각의 동물답게 어느 순간 그 고마움을 다 잊어버리고 나 혼자 잘난 맛에 살았다. 그래서 철이 들 수록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커지나보다.
여행 내내 엄마는 예쁜 풍경을 만날 때면 가던 길을 꼭 멈춰 서서 그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풍경을 찍고 나면 '너무 예쁘다 거기 좀 서봐' 하며 나를 찍어주기 바빴다. 그러면서도 본인 사진은 단 한 번도 찍어달라고 한 적이 없는 사람. 이번 여행에서야 나는 처음으로 내 카메라 앨범을 엄마의 사진으로 가득 채웠다.
해안도로 따라 달리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몇십 년 같이 살면서도 나는 엄마에 대해 참 모르는 게 많았구나. 창 밖으로 펼쳐지던 아름다운 풍경, 두 손 꼭 잡고서 나란히 걸었던 숲 길, 엄마와의 여행은 근래에 다녀온 여행에서 손에 꼽는 최고의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추억을 만들게 해 준 제주도에게 고맙다.
언젠가 다시 돌아갈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