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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라리 Aug 29. 2020

16년 추억을 가방 두 개에 담다

진작 좀 치우고 살 걸


뉴욕으로 떠나기 몇 주 전,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의 세월이 그대로 담겨 있는 서울 방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저 긴 여행을 떠나는 셈 치고 자주 입는 옷들만 챙겨 떠날 수도 있다. 언제든 다시 돌아 올 공간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


그런 안일안 생각을 하던 나에게 엄마가 일침을 가했다.


'끝 마무리가 잘 되어있지 않으면 시작도 못한다. 있는 것 다 정리하고 가렴.'


반박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다. 엄마는 맞는 말을 너무 맞게 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시작된 본격 방 정리.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다.


아이보리색 벽지가 심심하지 않게, 방의 한쪽 면엔 조금은 때가 묻어 색이 바랜 연분홍색 꽃무늬 포인트 벽지가 있다. 방 중앙엔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문이 있고, 창문을 열면 그 뒤쪽으로 조그마한 공간이 있다. 사람 두 명 정도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공간인데, 가끔 올라앉아 바깥 구경을 하기 좋은 곳이다.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무색하게 그저 진열장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책상과 책꽂이. 책상은 본연의 목적과는 정 반대로 앉은 사람을 딴짓을 하거나 엎드려서 잠을 자게 만든다. 책꽂이에는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모아 온 각종 교과서, 잡지, 만화책 등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다시 볼 일이 없는 게 분명 한 데도 막상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 같은 것.




나는 옷이 참 많았다. 천장 높이에 맞춘 문이 네 개 달린 옷장, 내 키보다 조금 작은 네 칸짜리 서랍, 그래도 공간이 부족해 추가로 구매한 이동식 행어. 그 많은 공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한 옷가지들이 항상 바닥에 굴러다녔다. 그래도 일 년에 몇 번 정도는 마음먹고 야심 차게 정리를 시도했으나 '혹시 입을 일이 생기면 어쩌지, 지금은 안 맞지만 내가 살이 빠질 수도 있는데, 유행은 돌아온다던데'라는 생각에 그저 있는 옷을 좀 더 잘 개는 정도로 그치곤 했다. 물론 일주일도 되지 않아 방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우선은 옷장을 비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버리려고 보니 저마다 사연이 없는 옷이 없다. 처음 클럽 가는 날 입으려고 산 미니스커트 - 엉덩이가 거의 다 보이는 걸 어떻게 입고 다녔는지 - 춘천 여행 간다고 친구들과 맞춰 입었던 티셔츠, 엄마를 졸라 비싼 돈을 주고 산 갈색 무스탕.. 버릴 옷을 고르기는 어려워, 가져갈 옷만을 고르고 나머지는 처분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선별을 위한 문항들 -


최근 1년 간 입은 적이 있는가?

입었을 때 내가 기분이 좋고 편안한가?

앞으로도 자주(월 1회 이상) 입을 예정인가?


그렇게 해서 가져갈 가방 2 개의 부피보다 약 두 배 정도 많은 옷들이 선발되었다. 도저히 나로선 추가 선별이 어려워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와는 조금 다른 기준으로 엄마는 옷들을 가차 없이 골라내기 시작했다.


'이 옷은 보풀이 너무 많다, 이 옷은 너무 무겁다, 여기 구멍 난 것 안 보이느냐..'


좋아하는 옷 들 중에는 유독 보풀이 많거나 때가 탄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나의 패션을 엄마는 '없어 보인다' '지저분해 보인다' 하며 코멘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동안 그녀의 눈에 거슬렸던 아이템들은 이 기회에 가차 없이 탈락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옷의 무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무거운 옷을 입으면 힘이 든다나.





모두 버리고 가방 두 개만 남았다.


옷을 정리하고 책상을 가져다 버리고 책꽂이를 모두 비우는 데 대략 2주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섭섭한 마음보다 해야 될 일을 했다는 기쁨이 컸다. 모든 정리를 마치고 나니 그동안 묵은 체증이 이제야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방을 본 온 가족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진작 좀 치우고 살 걸 그랬다 - 그래도 이제라도 치운 게 어딘가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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