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골목을 산책하다 아주 오래되고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집을 발견했다. 하루가 다르게 신축빌라가 들어서며 급격히 변해가는 동네 모습과 달리 그 공간만큼은 다른 시간에 있는 듯 홀로 멈춰 서 있었다. 그 낡은 집을 떠올리며 시나리오의 첫 장면을 썼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낡았다. 무언가 붙었다 떨어진 자국으로 여기저기가 얼룩덜룩하다. 미장을 오랫동안 하지 않아 칠이 벗겨지고 닳아있다. 건물이 부패한 느낌. 비슷한 구조로 지어진 건물들이 골목에 줄지어 있다. 왼편의 집은 폐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고, 오른편은 ‘유리, 산골 특산물’ 이라는 간판이 달려있지만 영업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나리오에는 선주와 유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선주는 부모의 부채를 갚기 위해 고된 일을 전전하다 이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다. 유영은 누군가에게 의지해 자신의 인생을 바꿔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유영하듯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게 스스로의 존재와 삶의 이유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다.
선주와 유영의 이야기를 통해 주어진 상황이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행복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데에 있다고 말이다. 이 시나리오를 쓰며 내가 나에게 진심으로 해주고 싶었던 말을 전하게 된 것 같다.
봄을 앞두고 있던 2020년 2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본격적으로 기초재활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 교육은 점자, 흰 지팡이 보행, 컴퓨터 사용부터 ATM 이용, 지폐 구분, 뜨거운 물 받기와 같은 세세한 일까지 중도에 시각장애를 얻게 된 사람들이 생활 전반적으로 재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나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들을 하나하나 배워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