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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인 Mar 28. 2021

7화. 내게도 다시 봄이 오나 봄

기초재활교육을 함께 받게 된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총 5명이었다. 시각장애가 생긴 이유와 장애 정도는 각각 달랐지만 모두 성인이 된 이후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교통사고, 녹내장, 망막질환 등 다양한 원인으로 시각장애를 얻었고 시력 악화가 진행되고 있는 사람, 정체된 사람, 전맹, 저시력 등 눈의 상태가 각각 달랐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분명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제가 눈이 많이 안 좋아서요. 혹시 제가 못 알아보고 인사를 못하더라도 오해하지 마시고 이해해주세요."


오리엔테이션 시간, A씨의 자기소개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내가 사람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늘 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죠. 우리 다 비슷할걸요?"


B씨가 웃으며 답했고 나도 "저도 그래요."하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척하면 척'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을 만날 때면 '서툰 행동이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하고 잔뜩 긴장하던 나였지만 동기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신기하게도 처음부터 편안함과 위로를 주었다.


우리는 매일 복지관에 나와 새로운 것을 배워나갔다. 점자와 컴퓨터는 시각장애인 선생님이 알려주셨는데 선생님의 전문성에 크게 놀랐다. 나의 손은 점이 몇 개인지 겨우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점자 선생님의 손은 점자 위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스크린 리더를 활용해 컴퓨터를 사용할 때는 마우스를 쓰지 않고 키보드로 모든 메뉴에 접근한다. 예를 들어 새 폴더를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은 바탕화면에서 마우스 오른쪽을 클릭한 후 '새 폴더 만들기' 메뉴를 클릭해 폴더를 만든다면, 시각장애인들은 마우스 커서나 메뉴의 글자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키보드 조작을 통해 시작 메뉴에서부터 많은 메뉴들을 순차적으로 선택해 새 폴더를 만든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컴퓨터보다 더 컴퓨터 같았다. 머릿속에 메뉴들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 듯했다. 수많은 단축키를 어떻게 그렇게 많이 외울 수 있나 신기하기도 했다. 오랜 훈련으로 쌓은 내공이 느껴졌다.


한편, 흰 지팡이 보행교육은 비장애인 선생님이 해주셨는데 선생님은 교육을 받을 때 안대를 끼고 다니셨다고 했다. 기초재활교육 총담당자였던 이 선생님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실생활 꿀팁 뿐만 아니라 복지관 내 이동부터 화장실, 정수기 사용 등 세세한 부분까지 친절하게 안내하고 가르쳐주셨다.


교육을 받으며 알게 된 것은 내가 시각장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주변에서 "눈 때문에 이거 못하겠네, 저거 못하겠네."하는 말들을 하면 나도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스스로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누군가 날 불쌍하게 여기거나 안타깝게 바라보면 나도 "맞아, 나 불쌍해."하고 스스로를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직접 시각장애인들과 교류하고 알아갈수록 그 생각이 한쪽으로 굉장히 치우친 사고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기초재활교육은 점자와 컴퓨터, 흰 지팡이 보행교육이 주를 이뤘지만 중간중간 요리나 원예, 볼링 수업도 있었다. 그리고 동료지지 상담 시간을 통해 시각장애인 심리상담 선생님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5월의 어느 날,

우리는 동료지지 상담 시간에 자신의 강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클레이로 자신의 강점을 만들고 설명하는 시간이었는데 모두 심혈을 기울여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펼쳐나갔다. 동기들과 선생님은 내가 만든 모형을 손으로 더듬으며 무엇인지 맞춰보았다.


"이게 뭐지..?"

"음.. 이건 반달인데.. 아, 알겠다!"

"눈이네요? 어머! 여기 눈동자, 동공도 동그랗게 만들었네!"


"정인님의 강점은 눈인가요?"


선생님과 동기들은 어릴 적 미술 시간으로 돌아간 듯 꺄르르 웃으며 서로의 작품에 대해 묻고 답했다.


"맞아요. 저는 제 눈을 만들어 봤는데.. '시선'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에게 시각장애는 흠이고 약점이었어요. 하지만 기초재활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아직 점자 신생아이긴 하지만 나름 저희 기수 중에서는 에이스거든요. 당장 이게 제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주진 않겠지만 조금씩 제 일상이 나아지고 있는 걸 느껴요. 요즘은 이렇게 장애로 인한 불편함을 덜어주는 방법들을 배워나가며 매일매일 새로운 가능성과 마주해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 됐고요. 과거에는 장애를 막연히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봤다면 이제는 제가 가진 하나의 특성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런 시선을 갖게 된 것이 저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이 강점을 가지고 제가 마주하는 많은 일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싶어요."


설명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몸이 조금 떨리는 것을 느꼈다.

교육을 받는 동안 내게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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