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을 정리하며 하이힐을 처분하기로 했다. 굽이 8센티부터 10센티가 훌쩍 넘는 것까지, 구두를 만져보며 어떻게 내가 이런 걸 신었던 건지 아득한 과거를 마주하는 듯했다. 일상용으로 신었던 구두부터 하객용 구두, 촬영할 때 신었던 구두와 무대 위에서 신었던 구두 등 구두 하나하나가 추억을 담고 있었다. 이 추억들을 보내줄 생각을 하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구두를 신고 나갔다가 턱 하나를 보지 못하고 고꾸라져 발목을 크게 다쳤던 일을 떠올리며 다시 굳게 마음을 먹었다. 무대 위에서 신었던, 추억이 가장 많은 자주색 벨벳 구두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실내에서 한두 번밖에 신지 않은 것들도 많아 따로 빼 헌 신발 수거함에 넣었다.
"잘 가."
구두를 하나하나 떠나보내며 필요한 곳에 닿기를 마음으로 빌었다.
그즈음 나는 '미라클 예술학교'라는 웹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배우를 준비했던 경험을 살려 쓰기 시작한 글이었는데 나름 상업적 글쓰기를 해보겠다고 호기롭게 도전한 작품이었다. 네이버 웹소설 공모전 기간에 맞춰 연재를 시작했는데 한 에피소드당 5,000자 분량의 글을 주 2회 연재해야 하는 꽤 힘든 작업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조회 수는 낮았고 내 글을 본 지인들은 왜 연기 이론서를 여기에서 쓰냐며 놀리기도 했다. 진지함을 덜어내고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자극적인 코드들을 넣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출품한 다른 작품들을 보고 뒤늦게 내 글이 장르나 내용적으로 웹소설 시장과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웹소설은 로맨스, 로맨스 판타지, 현대 판타지, 무협 등의 장르가 강세였고, 장르마다도 트렌드와 줄거리의 패턴이 있었다. 내 글은 그것에서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결국 공모전 수상 실패는 물론이고, 완결도 짓지 못한 채 중단한 비운의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나를 성장시켰다. 그동안 웹소설은 가벼운 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좋은 작품들은 인물묘사와 줄거리가 정말 탄탄했다. 한 작품당 기본적으로 100화 이상의 글을 쓰는 작가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의 경우에는 한 에피소드당 A4 7, 8장을 써야 5,000자가 채워졌는데 그렇게 18화 분량을 쓰다 보니 저절로 글쓰기 훈련이 됐다. 독자들의 반응이 싸한 덕분에 드라마에서 로맨스로 장르를 바꾸게 되었는데 연애 세포도 깨우고 심장이 말랑말랑 감성이 풍부해지는 여러모로 즐거운 글쓰기 시간이었다.
연재를 마칠 즈음 복지관 선생님의 추천으로 복지관에서 새롭게 오픈하는 유튜브 채널의 작가로 일하게 되었다.
'시각장애인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대본의 첫 문장을 쓰며 새 신발을 신는 기분이 들었다.
화려하고 멋지지만 불편함을 주는 하이힐이 아닌
내 발에 꼭 맞는 가볍고 편한 운동화를 신은 기분,
그렇게 나의 새로운 걸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