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 쪽파와 안 깐 쪽파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남편을 믿고 안 깐 쪽파를 샀다. 그리고 막걸리 한 병과 생물 오징어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오늘은 가까운 공판장에서 최대한 가볍게 장을 봤다.
남편이 쪽파를 다듬는 동안 오징어를 썰고 전 부칠 준비를 했다. 분업화는 요리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
배고픈 남편의 손은 빠르다.
밀가루를 적게 넣고 부친 파전에 지평 막걸리 한 병을 사이좋게 나눠 마시며 우리는 맛있다는 말을 백번쯤 했다.
드라마 ‘신성한 이혼’을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낮잠이 들었다.
푹 자고 깨니 그게 뭐라고 참 행복하네.
행복은 살짝 기분 좋은 취기 같고, 봄날의 낮잠 같다.
가끔은 어질러진 부엌을 뒤로하고 나는 행복을 택한다. 누가 뭐라고 할까? 내 부엌이 어질러져 있다고 걱정할 사람은 나뿐인 것을……..
낮잠을 자고 일어나 술잔을 치우고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하고 식탁 위를 반짝이게 닦았다.
저녁은 또 뭘 해 먹지 따위의 대단하지 않은 고민이 인생 최대의 고민이 되는 것은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지난겨울 친정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저녁 메뉴는 더 이상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다. 다시 낮잠이 들고 저녁 찬거리를 고민할 수 있게 된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행복은 함께하는 동안에는 너무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나이 듦의 장점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눈에 띄지 않는 행복들을 더 잘 찾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번의 불행이 나를 스쳐 지나갔고 그때마다 행복은 더욱 선명해져 갔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만 주말은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미세먼지가 뿌연 하루 속에서도 햇살은 반짝이고 창 밖의 목련은 조금씩 피어난다. 크고 우아한 하얀 꽃잎이 떨어지기 전에 더 자주 바라봐야지.
느리고도 평안한 봄날의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