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사람인지라 학생들이 제출한 에세이를 채점하다 보면 객관적이지 못할 때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로할 때에 에세이는 잘 안 읽힌다. 잘 읽히지 않는 에세이는 답변의 수준이 낮다고 판단한다. 1, 2점이라도 낮게 점수를 준다. 코멘트도 매우 짧게 형식적으로 남긴다. 반면, 명료한 정신으로 에세이를 읽으면 학생들의 의도와 상황, 핵심 내용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코멘트도 자세하고 점수도 높게 준다.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에세이를 평가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이번 학기는 매주 거의 60명의 에세이를 읽는다. 모든 에세이는 1장 내외라 다행이다. 그래도 글을 읽는 것은 부담이다. 읽고 평가하는 것은 더 부담이다.
수업 시간 "성격 Personality"에 관련된 내용을 토론했다. 성격의 주요 평가 방법은 MBTI와 Big five personality 두 종류가 있다. Big 5는 보통 조직행동론 연구에서 많이 다룬다. 반면 MBTI는 일반 상담과 같은 곳에서 더 많이 활용된다.
MBTI의 유형중 S(sensing)와 N(intuition)이 있다. 배우고 판단하는 방법에 관련된 것이다. S타입은 사실과 데이터에 기반한다. N타입은 이론과 직관에 기반한다. 나무를 보거나 숲을 보거나의 차이 정도. 이러한 설명과 더불어 학부생들의 MBTI 유형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그들의 출석부 옆에 각각의 유형을 써 놓는다. 참고로 나는 INTP이다. (아이들 키우고, 논문도 쓰다 보니 P에서 J 유형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학생들 MBTI 유형과 과제를 비교해 보았다. 나는 자세한 예시가 적혀있는 에세이를 좋아한다. 따라서, 내가 마음에 들었던 답변은 대부분 S유형을 가진 학생들이었다. 이런 학생들은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자세히 답변을 작성한다. 반면 N유형의 학생들은 직관적이고 추상적이다. 생략이 많아 대체로 짧다. 채점자의 입장에선 자세하고 예시가 풍부한 글이 더 잘 읽히고 재밌다.
나는 S와 N 유형에 따라 에세이의 특징이 다르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도 인간인지라) 평가하다 보면 S 유형 학생들의 에세이가 좀 더 잘 읽히고 점수도 잘 받는 경향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성격 유형은 무엇일까? MBTI나 Big5 성격 진단이 얼마나 정확하게 당신을 묘사할까? 이 주제를 학생들과 공부하며 수업 끝날 때에는 항상 두 가지 단어를 상기시켜준다.
묘사 (description)
처방 (prescription)
성격 진단은 당신의 성격이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에 대한 "묘사"이다. 묘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표현하는 것뿐이다. 반면, 처방은 성격이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령"이다. 자신의 성격 진단을 묘사가 아닌 처방으로 받아들일 때 문제가 생긴다.
성격을 '처방'으로 받아들이는 N 유형의 학생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나는 직관형이라 디테일에는 약해. 내 성격이니 어쩔 수 없지. 이번 학기 과제 점수 잘 받기는 글렀군!"
반면, 성격을 '묘사'로서 받아들이는 N 유형의 학생은 다음과 같이 반응하지 않을까. "이제야 알겠군! 어떻게 디테일 있는 글을 쓸 수 있지? 또, N 유형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어떻게 활용할까?"
학생들을 팀으로 나누어 서로의 MBTI를 공유하고, 이로 인해 팀원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된 부분이 무엇인지 토론하게 했다. 한 학생은 이제야 알겠다며 말한다. 자신은 J 유형이다. 팀 모임을 위해 약속 시간을 잡고 zoom 링크도 만들어 공유했다. 그런데 미팅 시간에 아무도 없었다. 모두 조금씩 지각했다. 다른 조원들은 모두 P 유형이었다.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더라.
앞으로 이 팀은 어떻게 될까? 만약 자신의 성격을 '처방'으로 오해한다면, P 유형의 학생들은 또 지각할 것이다. "오늘도 늦었네. P 유형이라 어쩔 수 없었어!"라면서 말이다.
내 성격 유형이 나를 섬겨야 한다. 내가 내 성격 유형을 섬겨서는 안 된다.
나는 N 유형의 소유자다. 자세한 예시를 제시하며 글 쓰는 것이 무척 어려운 사람이다. "그냥 척~하면 척!" 알아 들어야 하지 않나? 작년 1년 동안 책을 써보겠다고 끙끙대며 보냈다. 책의 내용에 대한 아이디어는 있었다. 그거면 금방 책을 쓸 줄 알았다. 그런데 디테일이 없으니 진도가 안 나가더라. 써놓은 글을 읽으면 항상 무언가 부족하더라.
"나 같은 유형은 책을 쓰기 힘들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내 성격 유형이 나를 결정지었다. 내 행동의 주인이 되었다. 나에게 명령했고 나는 그 노예가 되었다. 이럴 순 없다. "내 성격의 주인은 나야, 나!"라고 외치며, 평소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조금씩 꺼내어 브런치에 글을 쓴다. 읽는 독자분들을 위해 디테일과 풍성한 예시를 제시하려 (정말로) 엄청나게 노력한다. 그것이 아직 이 정도 수준이다. 뭔가 허전하다. 아니, 나에게는 이만큼 극복한 것이다(라고 위안한다). 계속 노력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