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트리플 콘체르토 8화 리허설 1

by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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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위한 트리플 콘체르토 C장조, 작품 56.

권오석은 베토벤 작품 중 이 곡을 유독 아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교향곡 3번 ‘영웅’의 그늘에 가려 생전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오석은 오히려 ‘영웅’보다 이 곡을 훨씬 높이 평가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피아노 트리오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세 악기 각각이 협주곡의 주인공이 되어 오케스트라와 맞서기도 하고, 다시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앙상블을 이루기도 했다. 이러면 곡이 난삽해지기 쉽지만, 전체 구조도 감정의 흐름도 기막히게 단단하다. 베토벤이 아니었다면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형식이었다.

오석이 이 곡을 특별히 사랑한 이유는, 결국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라 역시나 첼로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었다. 평소 피아노 트리오에서는 베이스를 받쳐주는 역할을 맡던 첼로가 여기서는 봉인이 풀린 듯 전면에 나서 노래했다. 1악장에서는 첼로가 주제를 제시했고, 2·3악장에서도 주요 선율을 길게 끌어가는 중심축이 되었다. 어떤 평론가는 이 곡을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거들어주는 첼로 협주곡”이라 부르기도 했다.

예니의 아버지로서 마음이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첼로는 애초에 피아노나 바이올린에 비해 협주곡 레퍼토리가 훨씬 적다. 클래식의 양대 거장인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첼로 협주곡을 단 한 곡도 남기지 않은 탓이 크다. 그 공백을 간신히 채워주는 작품이 바로 이 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였다.

1악장 서주의 요란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잠잠해지고 첼로가 제일 먼저 1주제를 제시하며 홀로 나설 때, 그 순간의 예니는 자라는 모습을 지켜 봐온 아버지의 눈으로 봐도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리허설이라 대충 차려 입었음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니 콘서트 당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를 때의 모습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허어….’

오석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자신이 방금 예니가 제일 싫어하는 행동—음악이 아니라 외모로 평가하는 일—을 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석은 마치 반성하려는 듯 눈을 감고 오로지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생각이 과거로 흘렀다. 어느새 오석의 마음은 15년 전인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 여름방학, 오석은 아내와 예니를 데리고 로마를 거쳐 런던으로 가는 여행을 떠났다. 겉보기에는 가족여행이었지만 실상은 출장이었다. 디누 재단의 의뢰로 권정우—즉 디누—의 전기를 집필 중이었고, 2009년에 이르러 초안을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화룡점정을 찍기 위한 마지막 인터뷰를 남겨 두고 있었다. 그 대상은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한때 디누의 연인이자 뮤즈로 알려진 지네트, 다른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 디누 재단 이사장이자 디누의 부인이었던 최유선. 로마에서 지네트를, 런던에서 최유선을 차례로 만나기로 했고, 기왕 가닌 김에 가족 여행도 겸해 본 것이었다.

그 시절 예니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키가 155cm까지 자라 3/4 사이즈에서 풀사이즈로 옮겨갈 시기를 가누고 있었고, 그 문제로 스승과 상의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예니의 스승인 정동진 교수는 서두를 필요 없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악기는 언제든 바꿀 수 있지만, 기본기와 피지컬은 지금 아니면 단단히 잡기 힘들어요. 괜히 빨리 바꾸다 버릇 잘못 들거나 몸이 상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뭐든 진도만 빨리 나가면 좋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죠.”

교육자로서 오석은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실제로 예니는 3/4 사이즈 악기를 든 채 여러 나라의 중·고등학교 언니, 오빠들을 제치고 굵직한 국제 주니어 콩쿠르에서 연달아 우승했다. 그 시절만 해도 예니의 별명은 ‘첼로 요정’이 아니라 ‘첼로 신동’이었다. 풀사이즈 악기도 잡지 않은 어린아이가 어른들도 어려워하는 곡을 여유 있게 연주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그저 놀라워할 뿐이었다.

런던에서 두 가족이 7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도 최유선은 정작 디누의 전기 작업보다 예니의 성장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오석은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2002년, 최유선이 로사와 마리를 데리고 런던으로 떠나기 전까지 두 가족은 해 마다 여름휴가를 함께하는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오석의 아내 하영은 유선과 언니, 동생처럼 지냈다. 무엇보다 유선은 예니의 대모였다. 그러니 유선이 7년 만에 만난 예니에게 살갑게 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니, 참 예쁘네. 엄마 닮았나 봐.”

이 말도 으레 이모가 조카에게 하는 인사 정도로 들었다.

사실 유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기 전 까지 오석은 예니의 외모를 크게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하영이 미인이라는 건 인정했지만, 오석은 하영의 외모 역시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오석은 하영의 미모가 아니라 머리에 끌려서 결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영은 오석이 상상할 수 있는 너머를 생각하는 사고력, 단단한 자존심, 올곧은 삶의 태도를 가진 여성이었다. 정우와 유선, 두 천재 커플 사이에서 약간 주눅 들어 지냈던 오석이 하영을 얻은 다음에야 비로소 관계의 균형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예니를 볼 때도 엄마 닮아 예쁘다는 생각 보다 엄마 닮아 영리하다는 생각을 주로 했다. 예니는 영아기를 갓 벗어난 무렵부터 얄미울 정도로 똑똑했고, 가르치는 족족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신동이었다. 그때마다 오석은 자신을 닮은 구석이 별로 없는 딸을 보고 무척 다행스러워하곤 했다.

그때 유선이 웃으며 자기 딸들을 재촉했다.

“로사, 마리! 뭐 하고 있어? 솜씨 좀 보여드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리는 이미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고, 로사는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둘은 열다섯 살이었지만 엄마를 닮아 키가 이미 170cm에 이르렀고 체구가 당당했다. 몸집만 보면 성인 연주자나 다름 없었다.

그들이 선택한 곡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

디누가 누나 미우와 함께 ‘미우 & 디누’ 듀오로 세계를 휩쓸던 시절의 간판 레퍼토리였다.

이들이 연주를 시작하자 처음엔 오석도 감탄했다.

마리의 피아노는 섬세했고, 로사의 연주를 따라가며 조율하는 감각이 탁월했다. 과연 디누의 딸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진짜 음악 애호가들은 대중에게는 화려한 솔리스트로 알려진 디누의 진짜 강점이 앙상블에 있었으며, 디누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음악이 독주가 아니라 앙상블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1악장 중간쯤 가면서 오석의 귀가 무거워졌다. 범인은 바이올린이었다. 로사의 바이올린은 기술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었고, 음색은 개성이 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칠었다. 강약 조절이 투박했고, 긴 호흡의 완급이 매끄럽지 않았다. 음표 하나하나, 마디 하나하나는 훌륭하게 연주했지만 이 마디들이 연결되어 메시지를 이루지 못하고 사이사이가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짧고 강렬한 곡이라면 빛을 발휘했을 것이지만, 두께 있는 소나타를 끌고 가기엔 숨이 거칠었다.

슬쩍 최유선을 보니, 얼굴에 실망을 넘어 분노가 서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게 연주야? 집어쳐!”라고 소리칠 기세였다.

그 얼굴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 순간, 오석의 눈에 예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있던 예니가, 몸이 근질거리는 듯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손놀림을 유심히 보던 오석은 깜짝 놀랐다. 예니가 ‘크로이처’ 원곡에는 없는 베이스 라인을 그려 넣으며, 공중에서 가상의 첼로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유선과 눈이 마주쳤다. 유선 역시 예니의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부러움이 동시에 스쳤다.

유선이 오석에게 낮게 속삭였다.

“예니 악기 안 가져왔지?”

오석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여행에 첼로를 어떻게 가져와?”

유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예니를 가리켰다.

“얘 좀 봐. 지금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잖아.”

“그래도 방법이 없지.”

그러자 유선이 비웃듯 말했다.

“방법이 없긴. 나 코벤트 가든에서 넘버 투야. 첼로 하나쯤은, 전화 한 통이면 돼.”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선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15분 뒤, 유소년 악단 교육용으로 쓰는 듯한 3/4 사이즈 첼로가 배달돼 왔다. 첼로를 보자 예니가 스프링처럼 일어났다.

그 사이, 로사와 마리의 ‘크로이처’ 1악장이 끝났다.

오석이 박수를 치려 하자 유선이 그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선배, 괜히 예의 차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어땠어?”

“열다섯 살에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하지.”

유선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디누는 저 나이 때 자기 또래가 아니라 거장들과 어깨를 견주었어.”

“그거야 정우는 천재였잖아.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그럼 저 아이들은 디누의 딸이야. 디누의 유전자를 받았다고. 게다가 내 유전자는? 선배도 인정하지? 나도 디누 못지 않았던 거?”

오석이 조심스레 말했다.

“정우를 잇는다는 게 꼭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잖아? 아니, 정우의 딸이라고 반드시 음악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이름까지 바꿔? 권로사, 권마리가 어째서 로사 디누, 마리 디누야?”

“영국 귀화하는 김에 현지에서 기억하기 쉽게 바꾼 거지. 이름만 들어도 누구 딸인지 알게 하려고. 그리고, 선배도 예니에게 첼로 시킨 거, 그거 예니한테 물어보고 한 거야? 그거 디누와 약속해서 한 거였잖아?”

“그렇긴 해도, 난 몰아붙이지는 않았어. 전공시키려고 가르친 게 아니었다고. 아이가 좋아하니까 계속한 거지. 더구나 열아홉 전에 세계 무대에 서야한다, 그런 욕심은 없어. 좋은 음대 나와서 시립 교향악단에 한 자리 잡는 정도면 충분해.”

“오호? 그래서 아직 풀사이즈 악기도 안 잡은 애를 초등학생 콩쿠르 싹 건너뛰고 청소년 콩쿠르에 내보냈어? 그것도 국제 대회에?”

“그건 자기가 하겠다고 해서 그랬어. 강요한 적은 없어.”

“그럼 애초에 예니한테 음악 말고 다른 길을 고르게는 해줬어? 과학, 수학, 미술—뭐든? 음악 하더라도 여러 악기 중에 왜 하필 첼로야? 처음부터 첼로만 쥐여준 거 아니야?”

“예니는 피아노도 잘 쳐.”

“그건 얘기가 다르지. 그런 식이면 로사도 피아노 잘 치거든.”

오석은 입을 닫았다. 유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래. 처음부터 첼로를 가르쳤어.”

유선이 낮게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 선배도 예니를 디누 레거시 계승에 내보낸거야. 친구의 딸도 그런데, 하물며 디누의 유전자를 직접 받은 내 아이들이라면?”

오석은 대꾸하려다 말고, 앞을 가리켰다.

“그건 그렇고, 저기 좀 봐.”

어느새 첼로를 든 예니가 로사와 마리 옆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짧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예니가 의자를 가져와 피아노 옆에 놓고 보면대를 세웠다. 셋이 함께 연주할 모양이었다.

“여기 트리오 할 만한 악보 있어?”

오석이 물었다.

“당연히 있지.” 유선이 대답했다. “디누 생전에 트리오 연주 얼마나 좋아했는데? 그때 썼던 악보 전부 보관해 놨어. 봐, 저기 로사가 하나 챙겨 오잖아.”

정말로 로사가 오래된 악보 뭉치를 들고 왔다. 셋이 악보를 넘겨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모습이었다. 어떤 건 예니가 고개를 젓고 어떤 건 예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석은 예니가 다섯 살 이후로 보지 못했던 언니들하고 악보만 보고 바로 합을 맞출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궁금했다.

마침내 선곡이 끝났는지 로사가 피아노와 보면대 두 군데에 악보를 올렸다. 그리고 세 소녀는 짧게 조율을 마치고 몇 마디 의견을 주고받고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긴 피아노 도입부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오석은 그 곡이 모차르트 피아노 트리오 K.496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순간 오석은 순간 무릎을 탁 치고 싶었다. 처음 호흡을 맞춰 보는 예니를 배려한 탁월한 선곡이었기 때문이다.

쌍둥이 자매는 평소 호흡을 맞춰왔지만, 예니와의 트리오 연주는 처음이다. 그런 상황에서 첼로 파트에 큰 무리가 없는 곡을 선택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이름만 트리오지, 실질적으로는 피아노의 비중이절반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아노 파트만 따로 연주해도 하나의 소나타로 성립될 정도였다. 여기에 바이올린이 가끔 노래하고, 첼로는 그 둘을 지탱하며 베이스를 더하는 정도의 역할만 담당하는 편성이다. 세 악기가 팽팽하게 주고받으며 연주하는 K.502 같은 모차르트의 다른 트리오로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인 것이다.

물론 첼로가 활약하고 싶다면 답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 지만, 피아노와 바이올린 사이에서 곡에 두께를 넣고 구조를 지탱하는 즐거움을 아는 연주자라면 깊이 빠져들 만한 그런 곡이기도 했다.

누구의 생각일까?

오석은 그것이 궁금했다. 악보를 가져온 건 로사였다. 그렇다면 선곡 역시 로사의 결정일 공산이 컸다. 그 말은 곧, 로사의 음악적 소양이 유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을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소양이 반드시 연주로 드러날 필요도 없고, 또 10대때 만개해야 할 까닭도 없었다. 오석은 유선이 정우의 비정상적으로 빠른 성장 -혹은 자신의-을 기준으로 삼아 너무 초조해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연주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적어도 오석의 귀에는 보자르 트리오나 보로딘 트리오의 연주보다 더 설득력 있게 들렸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오페라 아리아처럼 서로를 주고받으며 노래하고, 첼로가 거기에 추임새처럼 저음을 ‘둥, 둥’ 얹어줄 때, 그 조화는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이게 도대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만드는 소리란 말인가.

특히 로사의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피아노와 둘이서만 연주할 때는 다소 거칠고 자기색이 강해 귀에 거슬리기도 했던 소리가, 첼로의 부드럽고 단단한 저음과 만나자 마술처럼 정서가 정돈되고 호소력이 배가되었다.

“맞춰가고 있어.”

유선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게, 처음 같이 하는데도 잘 맞추네.”

오석이 대꾸했지만, 유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말은 예니가 맞춰가고 있다는 거야. 로사 저 제멋대로인 소리를, 예니가 밑에서 잡아주고 있다고. 자세히 들어봐.”

그제서야 오석은 예니를 유심히 살펴 보았다. 정말이었다.

예니는 피아노가 주도할 때는 소리를 얇게 내어 베이스만 살짝 깔아주고, 바이올린이 나설 때는 음을 두텁게 해 로사의 날카로움을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었다.

“저런 건 정동진 교수가 가르쳤을까? 그분 전공이 원래 실내악이니까.”

“아니.”

유선은 단호하게 잘랐다.

“그럼?”

“저건 배워서 되는 게 아니야. 타고나는 거야.”

“설마.”

“선배는 사람들이 예니더러 첼로 신동이라고 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로 들렸어?”

“그런 칭찬 많이 하잖아, 어릴 적에?”

“그건 일반인들 이야기고. 이쪽 사람들은 그 단어 아무데나 안 붙여.”

유선의 시선이 예니에게 머물렀다. 오석은 그 시선에서 감탄과 시샘 그리고 욕심까지 읽을 수 있었다.

세 악장이 모두 끝나자, 세 소녀는 서로를 향해 박수를 쳤다. 로사는 만족감이 가득했고, 마리는 자기 연주가 이렇게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이었다. 가장 어린 예니만이 태연했다. 그리고 미소 지으며 두 언니의 볼키스를 받았다.

그 순간 유선이 자기 딸의 훌륭한 연주와 예쁜 모습에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하영에게 불쑥 말했다.

“언니, 이런 거, 우리끼리만 보는 거 너무 미안하지 않아?”

“누구한테? 미안해?”

“누구든. 전 세계에.”

하영이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 셋이 콘서트라도 열어?”

“당연하지. 가능하면 투어도.”

투어라는 단어까지 나오자 유선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하영이 놀란 눈으로 오석을 향해 눈짓했다.

이때 유선이 오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배, 디누랑 한 약속 기억나? 예니 첼로 시키고, 그 다음은?”

“트리오 연주. 그래서 지금 했잖아? 나 감동받았다고.”

“맞아. 그 약속이 과연 이렇게 가끔 모여 가족 음악회나 가하자는 것이었을까? 디누 성격 알잖아? 그 사람이 화기애애한 가족모임 이런 거 생각하고 그런 말 했을까?”

“아니. 정우가 그럴 놈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렇게 한 번에 끝내지 말고 보자르 트리오 못지 않은 ‘디누 트리오’를 만들자고.”

오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퍽 의미있는 일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선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오석은 끄덕이던 고개를 중간에 멈추어야 했다.

“내년에 집중적으로 연습시키고, 내후년 초에 데뷔. 그리고 가능하면 그 때 부터 투어 잡고.”

“뭐라고? 난 한 10년 뒤, 얘들 20대 중반 쯤 되었을 때를 생각한 거야. 예니 아직 초등학생이고 풀사이즈 악기도 안 잡았어. 내후년이라고 해 봐야 중학교 2학년이야. 그게 가당키나 한 얘기야?”

“충분히 가능해. 날 믿어.”

유선은 연필을 꺼내더니, 오석 앞에 레터 용지 한 장을 꺼내 놓고 그 위에 세 줄을 긋고 왼쪽부터 차례대로 ‘2009 하반기’, 그 옆에 ‘2010 상반기’, ‘2010 하반기~2011 초’라고 썼다.

“선배, 잘 봐. 이렇게 가면 돼. 2009년 하반기는 곡 욕심 안 낼 거야. 초면이나 다름없는 셋이니까, 합 맞추는 감각부터 익혀. 모차르트 K.254 디베르티멘토, 하이든 두세 곡이렇게 첼로 비중 낮은 걸로 가. 예니가 받쳐주면서도 피곤하지 않게. 무대는 안 세우고 레슨만. 2010년 상반기는 예니 풀사이즈로 바꾸는 시기야. 이때 부터 첼로가 조금 더 움직이는 레퍼토리로 넓혀 가. 오전에 개인 레슨, 오후엔 합주, 저녁엔 피드백. 그리고 2010년 하반기에서 2011 초에는 본격적인 데뷔 준비야. 이제 고급 레퍼토리. 베토벤 1번, 3번, 5번 ‘유령’까지 배우고. 1년 반이면 열 두곡 완성. 이만하면 2년간 투어 돌아도 될 정도 레파토리야. 물론 그 이후에도 레슨은 계속 해야지. 슈베르트, 드보르작, 차이코프스키, 계속 한 해에 두 곡씩 늘려가는 거야. 불가능해 보이지? 충분히 가능해. 왜? 목표가 뚜렷하잖아. ‘디누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보자르 트리오, 보로딘 트리오를 넘는 거. 이건 프로젝트야, 선배. 내가 프로젝트 실패하는 거 본 적 있어?”

“아니.”

“그리고, 예니 풀사이즈 악기. 기왕 런던 온 김에 여기서 주문하고 가. 롤랜드 로스 선생한테 주문하면 보통 2-3년 걸리거든. 그 사이에는 적당한 거 쓰다가 2011년 데뷔 타이밍 맞춰 롤랜드 로스 들고 시작하자. 두 개 정도 필요해. 일단 바디부터 제작하고 넥, 지판, 엔드핀은 예니 좀 더 자라면 그때 커스텀 하고. 선배, 그리고 언니 그때까지 한 1억 정도 조달 가능해?”

하영이 깜짝 놀랐다.

“뭐 1억 이라고?”

유선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몬타냐나, 고프릴러 진품 쓰면 거기 0 하나 더 붙어. 하지만 롤랜드 로스 선생 복제품은 가성비 최고라고.”

저소득층 가정에서 태어나 결혼 이후에야 중산층 지위에 올라선 하영은 1억을 가성비라고 부르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듯, 어안이 벙벙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전히 부유한 오석은 오히려 침착했다.

결국 그들은 예니를 위해 롤랜드 로스 코프릴러 하나, 롤랜드 로스 도메니코 몬타냐나 하나 씩, 그리고 터브스 활 두 자루를 장만했다. 예니 할머니가 5천만원을 지원했다.

이게 트리오의 시작이었다.

추진력의 화신인 유선은 오석이 생각한 것 보다도 훨씬 빨리 일을 밀어붙였다. 2009년 여름방학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사와 마리가 런던을 떠나 서울에 있는 최수민 집으로 왔다. 디누의 수제자 최수민은 바로 이들의 훈련 스케쥴을 정했고, 디누 생전에 디누 트리오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담당했던 성주영 교수, 정동진 교수가 합류했다.

예니는 원래부터 정동진 교수로부터 레슨을 받고 있었고 성주영교수는 그 부인이기 때문에 바뀐 일정에 대해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평소 하던 대로 정동진 교수 레슨을 다 받고, 정교수 부부와 함께 디누 마스터 클래스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트리오 레슨을 다시 받고 밤 9시가 넘어 귀가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물론 오석은 어린이에게 너무 과한 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틈날 때 마다 예니에게 괜찮은지 묻곤 했다.

그때마다 예니는 짧게, 그러나 눈을 반짝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하나도 힘 안들어. 너무 즐거워. 새 곡들 빨리 빨리 익히는 것도 재미있고, 내가 디누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선다는 것도 너무 설레고. 마리 언니 피아노 너무 잘 쳐서 짱 멋지고, 로사 언니 재미있고. 2년이 빨리 확 지나갔으면 좋겠어.”

디누라는 이름 아래 무대에 선다는 생각만으로, 어린 소녀의 마음은 이미 충분히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렇게 예니가 중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세 사람은 전에 한 번 연주해 보았던 K.496을 포함한 모차르트의 트리오 다섯 곡을 모두 마스터하였다.

여기까지 기억해 내자 오석은 비로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15년만에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시작은 예니가 아니라 디누였다. 예니 스스로도 도취되어버려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 그 이름, 바로 디누였다. 그리고 그 디누라는 이름을 위해 동원된 것은 예니의 음악 뿐이 아니었다. 유난히도 자주 반복되었던 유선의 그 말.

“예쁘네.”

이 말.

“아아.”

오석의 입에서 반사적인 탄식이 나왔다. 그러는 동안 무대 위에서는 세 악기가 동시에 있는 힘껏 연주하는 트리플 협주곡1악장의 코다 부분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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