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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이어진 거창한 생일파티가 막을 내렸다. VIP들로 가득했던 초대 리스트와 방명록이 기념품으로 포장되어 주인공인 로사와 마리에게 전달되었다. 이로써 로사와 마리는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서른 살이 되었다.
모든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오후 네 시 무렵, JW 매리어트 호텔 스위트룸 거실 한복판에 거대한 캐리어가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정말 떠날 모양이네?”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조국 순례 여행 가야지.”
“어딜 갈 건데?”
“한국의 모든 국립공원, 모든 세계문화유산을 다 보고 갈 거야. 엄마 때문에 강제로 국왕 폐하의 신민이 되고 말았지만 난 한국인이라고.”
마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짐이 어마어마하네. 그런데 나는? 나도 가는 거야?”
로사가 마리를 와락 끌어 안으며 대답했다.
“봐, 캐리어가 하나야, 두 개야? 두 개잖아? 걱정 마. 숙소며 차량이며 다 커스터마이즈로 잡혀 있어. SUV 전일 렌탈에 기사도 붙고, 가이드도 따라 붙지. 한 삼천 정도 나왔나?”
“파티도 그렇고. 로사, 요즘 너무 쓰는 거 아냐?”
“걱정 마. 파티는 협찬으로 절반 이상 메꿨고, 이번 여행도 협찬이니까.”
로사의 표정과 말투가 단단했다. 마리가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복도 건너편 주니어 스위트에서 예니가 들어와 말을 받았다.
“여행사 광고 찍는 대신이구나?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디누 자매, 조국 여행기. OO여행사. 그림 좋네. 그런데 그걸 겨우 삼천에 넘겨? 웬일이야? 로사 언니 인심 많이 좋아졌다?”
로사가 태연히 대답했다.
“부모님의 나라, 신성한 조국 순례를 하는데 내 욕심만 챙길 수는 없지.”
그 말에 예니가 묘하게 웃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마리가 물었다.
“그런데 넌 집에 안 가봐? 여기서 전철 네 정거장이잖아?”
“아니, 다섯 정거장.”
“아무튼.”
예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니는 이번 한국 투어 기간 내내 JW 매리어트에서 지하철로 10분 거리에 있는 부모 집에서 단 하루도 지내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여전히 냉전 중이었고, 그 갈등은 ‘서로 피하면 괜찮아질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텔에 따로 머무는 편이 훨씬 편했다.
로사가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댄 채 예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집에 안 갈 거면, 너도 같이 갈래? 너까지 같이 가면 5천 넘게 받아 낼 수 있는데?”
“미안. 고맙지만 난 사양할래. 이번엔 오랜만에 지니 언니랑 시간 좀 많이 보내고 싶어.”
그 말을 들은 로사가 손뼉을 쳤다.
“야, 너 말 한 번 잘했다. 그럼 예진이까지 같이 가는 거 어때? 그쯤 되면 광고가 아니라 공중파 프로그램 감이야. 제목은 트리오 디누와 유노이아의 코리아 로드 트립. 어때? PD들이 엄청 좋아하겠는데?”
예니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진짜 못 말려. 그래도 그 감각 하나는 인정할게. 그런데 나 지금은 그냥 언니들 생일 축하하러 왔어. 막상 파티 때는 너무 요란해서 제대로 말할 시간도 없었거든. 로사 언니, 마리 언니 생일 축하해. 선물은 언니들 몰래 내가 저 트렁크 안에 슬쩍 밀어 넣었으니까 여행 가서 첫 숙소에서 열어 봐.”
이 말을 들은 로사가 아무 말이 없었다.
순간 예니는 깜짝 놀랐다. 로사가 말만 없는 게 아니라 눈가가 촉촉하게 젖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 로사가 운다고?
로사도 그런 자신에게 놀랐는지, 슬리퍼를 발가락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무표정해 보였지만, 그 얼굴에는 피로가 깊게 깔려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로사가 갑자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고백할 게 있어. 나 말이야, 프레이징이 약해.”
예니가 눈을 번쩍 들었다.
“갑자기 뭔 소리야?”
“소리를 길게 끌고 가는 호흡이 부족하다고. 그래서 악장 하나를 통째로 설계해서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거, 그런 거 못 해. 음표 하나하나에는 감정을 세게 실을 수 있는데, 그게 하나의 곡으로 이어지질 않아.”
로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 호흡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 나서. 내가 음악 이야기 하는게 그렇게 신기해?”
“아니, 그건 아닌데. 너무 탈맥락적이라.”
“그래도 계속 들어 봐. 엄마 말 대로 난 솔로로는 글렀잖아? 우리 엄마는 말은 정말 독하게 해. 그런데 더 기분 나쁜 건 그게 또 다 맞는 말이란 거야. 난 곡 전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잘 몰라. 그런 건 연구를 해야 하는데, 일단 책상에 앉으면 난 엉덩이가 진동하거든. 난 그런 거 도저히 못해. 그래서 늘 감정이 먼저 나가고, 곡이 그걸 못 따라와. 그러니 곡 하나를 온전히 책임질 수 없었지. 그러니 콩쿠르 나가면 기술 점수 만점, 표현 점수 빵점, 결론은 결선 직전에서 탈락. 그런데 마리는 그런 거 진짜 잘해. 악보 보는 눈도 섬세하고, 감정도 정확히 분배하고, 프레이징이 정말 기가 막히고, 아고직, 아티큘레이션 환상적이고. 그러니까 나는 마리가 해석한 구조 위에 그냥 탑승한 거야. 마리가 만든 음악 위에 내가 적절히 효과음을 낸 거지. 그 정도는 나도 잘할 수 있었으니까.”
마리는 반박하지 않았다.
로사의 말은 자조였지만, 동시에 너무 날것이라 마음을 찔렀다.
“그리고 예니.”
“응? 난 또 뭐?”
하지만 예니는 로사의 눈빛에 평소 같은 장난기가 전혀 없는 것을 보고 입을 닫았다.
“너한테 늘 고맙고, 사실, 미안했어.”
“미안하다니, 뭐가?”
“나는 고집도 세고, 성격도 급하고, 연주 스타일도 단조로워. 나도 알아. 내 연주는 잠깐 들으면 그럴듯한데 오래 듣기엔 거슬려. 그렇지. 근데 너는, 항상 그걸 첼로로 미묘하게 잡아줬지. 정말 섬세하게. 그래서 내 약점이 오히려 개성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줬어. 내가 솜씨는 없어도 귀는 정확하거든. 사실 우리 셋 중에 국제 콩쿠르에서 솔로로 나가서 상 못 받은 사람, 나 밖에 없잖아. 난 그게 늘 부끄러웠어. 그래서 말인데, 한때는 널 미워하기도 했어.”
마리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마리의 눈빛이 쌍둥이들 사이에만 통하는 소리 없는 언어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로사의 얼굴에는 웃음기 대신 깊고 오래된 숨결이 조용히 흘렀다. 진심이었다.
예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언니는 내가 트리오에 합류한 첫날부터 달갑지 않게 여겼잖아? 그래도 13년이나 같이 잘 해왔잖아? 물론 내가 여기서 ‘로사 언니 사랑해’ 이런 말 하면, 그건 거짓말일 거야. 하지만 언니를 미워하진 않아.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언니도 지금은 나 미워하지 않지?”
로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은 안 미워. 근데 그땐 그랬어.”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
로사가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내쉰 뒤 말했다.
“마리는 알 거야. 엄마가 우릴 얼마나 몰아붙였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그 ‘디누’라는 이름 안에서 짓눌리며 컸는지. ‘디누의 딸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그 말도 안 되게 높은 기준들. 그리고 마침내 내려진 엄마의 냉정한 선고. ‘너희는 솔로는 글렀어’”
“로사.”
마리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왜 그걸 자꾸 후벼 파고 그래?”
하지만 로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엄마가 예니 데려왔고, 난 화가 났어. 솔로는 글렀다면 우리 둘이 듀오 하면 되잖아? ‘디누 시스터즈’로. 아빠도 고모랑, 아녜스랑, 지네트랑 계속 듀오 활동 하면서 유명해졌잖아? 근데 왜 우리 사이에 첼로까지 끼워서 트리오야? 그러다 알아챘어.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거. 내가 마리랑 50대 50으로 듀엣 할 능력이 안 된다는 거. 그거야 몇 번 연주해보면 바로 알 수 있거든.”
예니가 놀란 듯 고개를 확 돌렸다. 묶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순간 붕 떠올랐고, 거실 천장의 조명이 그 결을 따라 번쩍였다.
로사가 그런 반짝이는 예니의 얼굴을 감탄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미워했던 거야. 내가 못난 걸 인정하지 못하고, 그걸 너한테 돌린 거야. 게다가 너는 말이야, 너무 예쁘기까지 했어. 그래서 두 배, 세 배로 더 미웠어. 엄마 생각이 뭔지 뻔히 보였으니까. 네가 신동 소리 들은 거야 알고 있었지.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풀사이즈 악기 잡은 지 1년도 안 된 애를 데리고 세계 무대에 나가자고 했을 땐 실력만 본 게 아니었을 거니까. 얼굴이지. 디누 이름에 예니 얼굴을 얹어 브랜드를 완성하자는 속셈이니까. 그걸 알수 있어서 더더욱 미웠어. 아, 난 저 예쁜 아이 도움 없이는 디누 조차 될 수 없구나.”
예니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래서 그 동안 내 사진이며 영상이며 그렇게나 찍어댔던 거야?”
“그래. 엄마 보란 듯이. ‘엄마가 비주얼 때문에 얘를 데려왔잖아?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선전해 줄게.’ 이런 마음으로. 하지만 엄마는 그거 질색했어. 명색이 트리오 디누인데 사람들 관심도 인기도 다 예니한테 몰리니까. 공연 끝나면 우리 두 자매 합친 것보다 예니 팬이 더 많이 몰려오곤 했잖아? 엄마는 그거 정말 싫어했어. 그런데 나 사춘기였잖아? 엄마가 싫어하니까 이상하게 더 그러고 싶어지더라. 사실 다른 마음도 있었어. 뭐랄까, 좀 얄미웠달까?”
예니가 피식 웃었다.
“내가? 그건 인정. 내가 여우과라 조신하게 행동하진 않아. 좀 얄미운 면이 있긴 해.”
“맞아. 딱 여우 같다는 생각을 했어. 우리 트리오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성공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트리오 데뷔하자마자 바로 투어 잡히고 막 잡지 표지에도 나오고 그러니까. 나랑 마리는 그렇게 엄마한테 후달리고 연습하고 정말 죽도록 고생하고 스트레스 받고 그러다 간신히 트리오라도 된 건데, 넌 얼굴 예쁘다고 어른 악기 잡고 1년 만에 바로 세계무대? 그냥 날로 먹는 거야? 이런 생각.”
예니가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제일 중요한 것. 디누 핏줄도 아니고?”
“맞아.”
로사가 웃지도 바로 대꾸했다. 그 말에는 약간의 쓸쓸함이 섞여 있었다.
“그렇다면 너 얼굴로 들어온 김에 얼굴값을 제대로 하게 해주마, 이런 기분이었달까? 그래서 너, 유노이아 한다고 반년 빠져나갔을 때, 진짜 엄청 화가 났어. ‘단물 싹 빨아먹고, 그거 밑천 삼아 더 크게 벌려고 아이돌 판으로 갔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예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 말에는 원망도, 항변도 없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그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마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말할게.”
마리가 창밖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혼자서는 청중을 감당 못 해. 수백 명, 수천 명이 날 바라본다는 생각만 하면 머릿속이 그냥 하얗게 지워지는 것 같아. 무대에 서면 심장이 쿵쿵 울려서, 건반을 정확하게 터치하기도 힘든 순간이 있었어. 근데 예니, 네가 들어오고 나서 그 모든 시선을 네가 다 받아 주었잖아. 그게 정말 고마웠어.”
로사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 얘기는 전에 했잖아. 생일파티 때. 예니 예쁜 얼굴이랑, 앞에서 나대는 나 덕분에 네가 시선 걱정 안 하고 연주할 수 있었다고.”
“맞아. 그 말 다시 하고 싶었어. 진심으로, 고맙다고.”
예니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가 마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단정하고 맑은 목소리로 바로 말을 이었다.
“뭐야, 돌아가면서 고백하는 시간이야? 그럼 내 차례네? 나도 할 말이 많은데.”
“그래. 지금 해. 우리 모두 오늘은 좀 센티멘털하니까.”
“좋아. 말할게. 나, 아직 스물일곱 밖에 안 됐지만, 인생의 절반을 디누라는 이름과 함께 살아왔어. 언니들한테는 아빠지만, 나한테는 아빠 친구고. 사실 디누가 어떤 분인지 얼굴도 잘 기억 안 나. 하지만 그 이름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는 알아.”
마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우리 자매 짐인데, 우리가 부족해서 너까지 짊어지게 했어.”
예니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웃었다.
“아냐. 난 오히려 감사해. 언니들 만난 거, 생각하면 할수록 말도 안 되는 행운이었거든. 생각해 봐. 열네 살 밖에 안되는 애가, 풀사이즈 악기 갓 잡은 상태로 무려 세계 무대에 데뷔했어. 그리고 3년 만에 1년에 40회씩 세계 투어 다니는 위치에 섰어. 겨우 열 일곱 살에. 디누 이름 아니었으면 이거 절대 불가능했을 거야. 근데 점점 그 이름이 너무 무겁더라. 게다가 사람들이 연주가 아니라 얼굴을 본다는 게 느껴졌어. 미모가 어쩌고, 첼로 요정 어쩌고 하는 말이 너무 짜증났고. 난 음악에 진심이었는데 말이지. 갈수록 청중들 중에 음악이 아니라 내 얼굴 보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러다 나중에는 클래식 음악회 기본 매너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늘어나서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그래서 너무 미안했어. 특히 마리 언니한테. 안 그래도 객석 분위기에 민감한데.”
로사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 그날. 생각난다. 1부에 드보르자크 3번, 2부에 드보르자크 4번 하는 날이었지? 3번 1악장이 좀 길고 요란하지? 예니 얼굴 보러 온 사람들,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좀 쑤시고 있다가 1악장 끝나니까 신나게 박수치고 휘파람 불고 예니 이름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지. 마리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렸고.”
예니도 민망하게 웃었다.
“아, 그때 정말 쥐구멍이라도 파고 싶었어. 그래서 2부 둠키 할 때 마리 언니가 악장 사이에 쉬지 않고 계속 달렸잖아. 40분을. 나는 4악장 끝날 때 튜닝이 풀렸는데도 마리 언니가 쉬질 않으니 5악장, 6악장 계속 풀린 채로 적당히 맞춰가며 갔다니까.”
마리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랬다가는 박수 소리를 여섯 번 들을 판이라서.”
예니가 마리의 손을 잡았다.
“그때 너무 미안했어. 마리 언니가 연주에 얼마나 완벽주의자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지 아니까. 내가 민폐구나 싶었어. 그런데 소속사에서 계속 ‘얼굴 마케팅’ 드라이브 걸고, 그럴수록 이상한 관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그래서 너무 화가 났어. 그래서 벗어나고 싶었어. 디누라는 이름의 무게, 그리고 예술이 아니라 얼굴로 팔리면서 아닌 척하는 위선의 무대에서. 유노이아에 들어갔던 진짜 동기, 이건 처음 말하는 건데 사실 좀 유치했어. ‘클래식입네 하면서 자꾸 아이돌 취급하지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예 대 놓고 아이돌 해버리는 수 있어.’ 이런 마음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없었지. 스무 살에 권태기라니.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그냥 디누 자매에 얹힌 존재였는데.”
그 말에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예니는 부드럽고 단단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트리오 디누에 탑승 못했으면 그냥 흔한 명문 음악원 출신 연주자였을 거야. 근데 봐, 스물일곱 살인데, 남들 같으면 한창 경력을 시작하고 여기 저기 오디션 보러 다닐 나이인데 벌써 국제 경력 14년차야. 이 말이 좀 우습지만, 월드 클래스급 아티스트라 불리고. 이게 다 언니들 덕이야.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런 생각을 못했어. 너무 어릴 때 트리오 디누라는 배에 어른들 손에 이끌려 타버렸기 때문에, 아니 태워졌기 때문에. 그러다 정신 차리고 보니 배가 엄청 빨리 달리고 있는데, 난 그 배가 어디로 가는지도 왜 타고 있는지도 모르는 거야. 그래서 잠시 내려서 돌아보고 싶었는데, 계약이 거의 노예계약이라 멈출 수가 없는 거야. 결국 유노이아에서 ‘빌려가는 형식’으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어.”
로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거듭 거듭 미안해. 난 진짜 몰랐어.”
예니가 밝게 말했다.
“괜찮아. 그날, 생일 파티 때 언니 앞에서 춤췄던 거 있잖아. 욱해서 한 거 아냐. 진심이었어. 감사했고, 미안했고. 그리고 정말 좋아서.”
로사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나, 그날 울 뻔했어. 근데 화장이 너무 진해서 꾹 참았지.”
그리고 셋은 동시에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자 눈물 없는 울음이었다.
이때 로사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야, 분위기 너무 꿀꿀하다. 아직 생일 주간 안 끝났어. 우리 클럽 가자. 가서 남자나 낚는 게 어때? 전화번호 제일 많이 따오는 사람이 이기는 거로 하고 꼴등이 술값 다 계산하기.”
“야! 무슨 그딴 게임을 해?”
마리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로사는 이미 마음이 클럽으로 달리고 있었다.
“요즘 틴더도 글램도 질렸단 말이지. 아날로그 감성이 그립다니까. 직접 눈으로 보고 말도 걸고, 춤을 추고, 분위기를 타고, 그렇게 낚는 게 더 재밌다고.”
예니도 보탰다.
“오랜만에 메이크업 빡세게 하고 나가볼까? 음. 지니 언니 스타일로 꾸며야겠다. 안 그래도 우리 둘이 닮아서 친자매라고 루머도 돌았거든.”
결국 한 시간 뒤 그들은 택시를 불러 타고 이태원을 향했다.
목적지는 클럽 ‘소프 서울’. 불빛들이 현기증 나게 춤을 추며 벽에 반사되고 있었고, 그 사이로 EDM 사운드가 깊숙한 본능을 자극하며 흘러나왔다.
제일 먼저 로사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버건디 실크 슬립 드레스가 조명에 따라 마치 와인처럼 번졌다. 옆 트임 사이로 반짝인 건 메탈릭 골드 스트랩 힐, 발목에 감긴 얇은 체인이 걸을 때마다 섬세하게 흔들렸다. 허리에는 얇은 구찌 체인 벨트가 번쩍였고, 손에는 보테가 미니 클러치. 173센티의 늘씬한 실루엣이 네온 속을 유영하듯 걸어가자, 시선들이 연쇄적으로 돌아갔다.
남자들이 나방이 불빛에 이끌리듯 주위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로사는 교묘했다. 시선은 주되 몸은 언제나 한 뼘 멀리 두며, 리듬에 맞춰 머리칼을 흩날리고 가볍게 몸을 흔들 뿐이었다. 마치 약속 없이 희망만 주는 것 같았다.
예니는 자신의 가장 큰 무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과시 대신 ‘여백’을 택했다.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는 단추를 두어 개 풀어 목선을 길게 드러냈고, 블랙 마이크로 스커트는 허벅지 중간에서 날카롭게 잘려 시선을 끌었다. 피부는 파운데이션조차 느껴지지 않는 투명 메이크업, 속눈썹은 마스카라 없이 결만 정돈했다. 입술엔 색감 대신 촉촉한 립밤을 발라, 물 한 모금 머금은 듯 은근한 윤기를 남겼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그러나 그 모든 계산이 치밀하게 설계된 딱 ‘지니 스타일’이었다.
남자들이 수근거렸다.
“혹시 지니 아니야?”
“살짝 다른데?”
“방금 로사 디누가 요란하게 지나갔잖아? 그럼 쟤는 틀림없이 예니야.”
“그렇구나. 지니랑 자매라는 얘기 있던데 실물 보니 닮았네.”
공기가 긴장으로 떨렸다. 예니는 그 순간을 정확히 포착했다.여우같이 부드럽게 고개를 기울이고, 머리칼을 비단처럼 넘긴 후 깊고 어두운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다가오려는 찰나, 입 끝만 살짝 올리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치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남자가 그 마력에 이끌려 다가와 “혹시.”라고 입을 열자, 예니는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대고 미소 지었다.
“쉬. 지금은 음악이 너무 좋아서요.”
그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고, 남자는 황홀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나려 했다. 그러자 예니가 남자의 타이를 잡아 끌며 말했다
“그렇다고 가진 말고. 기다려요. 다음 곡에선 춤 춰야 하니까.”
남자가 기쁨 반 놀람 반의 얼굴을 하고 예니 옆에 앉았다.
마리가 예니 귀에 속삭였다.
“너 이러는 거 처음 봐. 너무 이상해.”
예니가 까르르 웃었다.
“내가 그랬잖아? 나 원래 여우과라고.”
밤이 깊어갈수록 예니 주변으로 더 많은 남자들이 모여들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있는 것처럼, 진짜로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는 몇 안되었다. 물론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로사는 아예 남자들로 에워 싸여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키가 커서 그나마 보였지, 보통 키였으면 완전히 파묻혀 버렸을지도 몰랐다.
마리는 와인잔을 기울이며 그 광경들을 지켜보았다.
“아,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람,”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시간을 보낸 뒤 그들은 새벽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로사가 하이힐을 한 손에 들고 맨발로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못 낚은 사람이 클럽비 다 계산하기였지? 결국 우리 아무도 못 낚았으니까 내가 계산했어.”
예니가 은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못 낚은 게 아니라 안 낚은 거 같던데?”
그 순간 세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소리는 새벽 서울의 거리 위로 흩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