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트리플 콘체르토 6화 서른번째 생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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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1일 밤, 유노이아 뷰티 뮤지엄 2층은 마치 작은 왕국 같았다. 바닥에는 톤 다운된 크림색 러그가 깔려 있었고, 입구는 수국과 난초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객들은 소이가 내부 모습 공개를 싫어한다는 걸 이미 아는 사람들이라 아무도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대신 언제든 사진 찍힐 준비는 되어 있었다.
플로어에는 둥근 테이블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리 잡았고, 각 테이블마다 이름이 적힌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 이름들의 면면을 보면 뷰티와 패션 씬을 주름잡는 인플루언서들, 셀럽들, 사업가들, 명품 하우스의 디렉터들까지 총 망라되어 있었다.
무대 앞 대형 스크린이 희미하게 켜지고,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조용한 숨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여러분, 조용히 주목해 주세요. 지금부터 로사 디누와 마리 디누의 서른 번째 생일 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 목소리가 유노이아의 소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고 목소리 뿐이었지만 모두 그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인기피증으로 고생하던 소이가 이렇게라도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목소리만 나온다고 서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두 개의 스포트라이트가 좌우로 갈라지면서 로사와 마리가 양쪽에서 등장했다.
오른쪽에서는 마리가 등장했다. 단정한 파스텔 핑크 드레스에 짧게 묶은 머리, 은색 실루엣 힐을 신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마리로서는 가장 사치스러운 차림이었다.
무대 위 조명이 천천히 밝아지며 왼쪽에서 로사가 등장했다. 검은 실크가 물결치듯 흐르는 백리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이디 슬리먼의 손에서 태어난 완벽한 실루엣이었다.
귀에서는 티파니의 드롭 이어링이 조용히 흔들렸고, 손목에는 같은 브랜드의 T 브레이슬릿이 무심히 걸려 있었다. 손에는 블랙 새틴의 셀린느 트리옹프 백이 들려 있었다. 구두는 생로랑의 앰버 샌들로 굽이 무려 11센티나 되었지만 그 위에서도 로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마치 하나의 룩북처럼 완성되어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붙잡는 건 로사의 얼굴이었다. 마리와 나란히 앉은 로사는 평소처럼 웃지도 않았고,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먼저 마리가 마이크를 잡았다.
“사랑하는 로사. 내가 태어난 날은 사실 네가 태어난 날이기도 해. 우리는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세상에 왔으니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생일이 그만 네 것이 되고 말았어. 하지만 나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어. 왜냐하면 언니는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로사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눈을 깜박였다. 마리가 말을 이어갔다.
“이 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말하자면 시간이 모자라요. 하지만 오늘은 그중 하나만 얘기할게요. 로사는 때로는 정말 어이없고, 너무 솔직하고, 말도 안 되게 고집이 세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미워지지 않아요. 그게 로사예요.”
객석에서 웃음과 박수가 터졌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로사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웃으며 말했다.
“마리, 생일 축하해. 그리고 좋은 말 해줘서 고마워. 마리는 참 좋은 점이 많은 아이예요. 그런데 그중 가장 좋은 점은 저를 미워하지 못한다는 것이랍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미워해도 단 하나 내 곁에 남아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마리일 거예요. 그래서 서른 번째 생일을 맞아 마리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꼭 들어주고 싶어요. 지금은 작은 선물부터.”
스태프 한 명이 무대 옆에서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로사가 그 상자를 받아 마리에게 건넸다. 상자 안에는 미리 맞춰둔 셀린느 트리옹프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마워. 그럼 나도. 생일 축하해, 로사.”
마리도 스태프가 건넨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를 받아 로사에게 내밀었다. 로사가 조심스레 뚜껑을 열자 마리와 객석의 하객들이 함께 놀랐다. 상자 안에는 마리가 준비한 부셰롱 진주 반지만 있는 게 아니라, 전에 봤던 루이비통 리미티드 반지가 함께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다이아몬드와 오닉스가 교차하는 독특한 디자인이 조명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였다. 하객들 사이에서 감탄의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마리가 ‘너, 이걸 정말 샀어?’ 하는 표정으로 로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객들은 검소하기로 유명한 마리가 언니를 위해 수천만 원짜리 선물을 준비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폭포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이미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인 이상,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교황청의 장엄한 의식처럼 선물을 교환하며 눈빛을 마주쳤다.
순간 마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로사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인 것이다. 마리가 아는 로사라면, 이렇게 엄청난 고가의 셀프 선물까지 준비할 때 미리 퍼포먼스에 가까운 요란한 말과 행동을 준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하다니 마치 평생 함께 시간을 보낸 자매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도쿄에서도 여느 때와 달랐다. 도쿄에 도착해 공연을 이틀 앞두고 마리는 로사, 레오와 셋이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만나 좋은 와인을 나눠 마시며 근사한 저녁식사를 했다.
세계 주요 도시에 갈 때 마다 멋진 남자와 자매가 저녁 식사를 하는 일은 마리에게도 익숙한 일이었다. 로사는 레이아 앱을 통해 세계 주요 도시마다 한두 명씩 ‘썸나잇’을 만들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썸나잇은 연애도 아니고, 원나잇도 아닌, 그 중간쯤에 걸쳐 있는 관계를 말했다. 하룻밤으로 끝내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한 사람한테 매여야 하는 연애는 싫은 로사만의 방식으로 잘 정리된, ‘다음 밤을 기약할 수 있는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레오는 도쿄의 썸나잇 상대였다. 물론 로사에게 도쿄의 썸나잇 상대가 레오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레오 역시 그럴 터이긴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로사가 평소보다 말수가 적었다. 심지어 레오의 시선을 슬쩍 피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남자의 시선을 피하는 로사라니? 그것도 레오 쿠조 같은 멋진 남자의 시선을?
그리고 지금. 리미티드 반지를 꺼내 들고도,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도, 로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려한 복장 아래, 한 점의 불꽃도 없는 눈동자.
마리는 그 텅 빈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다,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로사. 왜 그래? 대체 무슨 일이야?’
그때였다. 소이의 또렷한 음성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이제 오늘의 축하 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순간 공간이 호흡을 멈춘 듯 고요해졌고, 스피커를 통해 첼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긴 서주에 이어 점점 가속이 붙는 활 놀림.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리드미컬한 프레이징. 클래식과 팝,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그런 음악이었다.
마리도, 로사도, 그리고 하객들도 모두 그 곡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러브 오브젝트.
유노이아가 미국을 흔들었던 2017년 북미 투어, 예니가 유노이아의 임시 멤버로 합류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바로 그 무대의 오프닝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빨아들일 듯한 모습으로 예니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마리는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검은 가죽 숏 팬츠, 슬리브리스 크롭탑 차림의 예니가 전기 첼로를 어깨에 둘러멘 채 모델 워킹을 하며 런웨이를 걸어 무대 중앙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로사와 마리 앞에 다다른 예니가 활을 번개처럼 내려치며 강렬한 연주를 시작했다. 하객들의 웅성거림은 탄성으로, 탄성은 환호로 바뀌었다.
연주가 절정에 이를 무렵 조명이 마치 불꽃놀이 폭발하듯 반짝이며 스트로브 효과를 내고, 그 사이로 은빛 시퀸이 박힌 미니 드레스를 입은 지니가 찬란한 미소와 함께 무대를 휘감으며 뛰쳐나왔다.
하객들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지니!”
지니가 비명치는 하객들에게 손 키스를 날린 뒤 첼로 리듬에 맞춰 몸을 틀고, 회전하고, 속도를 올리더니 유노이아의 마지막 히트곡 ‘Love Object’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치 짜인 듯 완벽한 시퀀스를 만들어내며 무대를 유노이아의 황금기로 되돌려 놓았다.
곡이 끝나자 파티 분위기가 불끈 끓어 오르고 하객들이 열광적인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라이브 스트리밍도 폭주했다. 로사의 인스타 라이브 동시 접속수가 순식간에 3만을 넘어섰고, 유튜브도 2만을 가뿐히 돌파했다.
이때 다시 음악이 들려왔다. 이번엔 첫 음부터 모두가 알아챘다. 모를 수가 없는 음악이었다.
‘Blooming Days’. 유노이아의 최고 히트곡. 발표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해마다 봄 소식을 알려주는 국민 가요가 된 노래.
그런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CD나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는 원곡의 하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노이아 팬, 팬이 아니더라도 201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잊을 수 없고, 누구나 그리워하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소이.
객석의 모든 시선이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설마 진짜야?”
“녹음 아니야?”
속삭임들이 오갔다.
그리고 마침내, 조명이 다시 바뀌고 무대 위에 소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하객들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니와 소이. 유노이아의 전설적 투 센터가 7년 만에 마침내 한 자리에 섰다.
화면 속 동시 접속자 수가 또다시 솟구쳐 단숨에 7만을 넘어섰다.
그러는 사이 무대 뒤편에서 조용한 움직임이 있었다. 예니가 전자 첼로를 내려놓더니 지니 곁으로 다가갔다.
예니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트리오 디누의 첼리스트 예니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순간 로사가 고개를 숙였다. 마리는 고개 숙인 로사 얼굴에서 부끄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2주 전, 생일 파티 이벤트를 기획할 때 로사는 예니에게 춤을 춰달라고, 6개월이지만 아이돌 경력 있지 않느냐고 모욕적인 발언을 했었다. 그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그때 예니를 곤경에서 구하기 위해 5년간 공개 석상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 소이까지 나섰다. 그런데 정작 예니가 이렇게 직접 나서서 아이돌 복장을 하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로사가 억지로 울먹이려는 목소리를 꾹꾹 씹어 삼키며 말했다.
“너희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마리가 조용히 로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생일이니까. 그것도 서른 번째. 그냥 즐겁게 받아.”
“그래도. 예니한테 내가. 어쩌자고 그런 말을.”
“괜한 생각 마. 예니 얼굴을 봐. 저게 마지못해 하는 걸로 보여?”
로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즐거워하네. 예니 저렇게 웃는 거 별로 못 봤는데.”
“그렇지?”
“그러게. 그런데 마리. 너 뭔가 생각하고 있는 거 있지?”
마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사는 그게 무엇인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굳이 말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모른 채로 있고 싶었다. 아니, 그냥 모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