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장편소설 디누2부 1권 14화 전조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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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야. 나 너무너무 떨려.”
나경이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정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떨릴 게 뭐가 있어?”
“소정이 다시 볼 자신 없어. 소정이 앞에서 바이올린 켤 자신은 더더욱 없고.”
“괜한 걱정.”
정우가 나경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정말 괜찮을까?”
“괜찮아. 네 연주, 절대 나쁘지 않아. 테크닉 좀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네 연주에는 테크닉으로 해결할 수 없는 따스함이 있어.”
“그럴까?”
“물론이지.”
그들은 광화문 입구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평창동 쪽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인 Y예술고등학교 연습실로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기다리던 지네트가 활짝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나경아 안녕. 너희 이제 다시 만나? 잘됐다. 절대 빈말 아니야.”
정우가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 얼마나 모였어? 설마 우리 둘만 있는 건 아니겠지?”
“천만에. 일단 보고 얘기해.”
“아니, 이런!”
정우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정우의 눈앞에 비록 30명이 채 안 되지만 2관 편성으로 각 파트가 고루 갖추어진 오케스트라가 좌석 배치까지 정확히 끝내고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연 날짜 잡아 놨어. 2월 마지막 목요일 7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공연 팸플릿 주문, 티켓 발권 주문 다 했어. 곡목은 아직 빈칸. 그건 네가 결정해야 해. 그러니까 넌 이제 음악만 신경 써. 나머지는 다 내가 처리할게. 사실은 해리슨 패럿에서 처리하는 거지만. 난 널 무대에 세우기 위해서 뭐든 할 거야.”
“좋아. 잘 해보자.”
정우가 주먹을 가볍게 쥐고 나경과 함께 단원들 앞으로 나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권정우입니다.”
정우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단원들이 보면대를 가볍게 두드리며 화답했다.
“여기는 제 친구 최나경입니다. 함께 좋은 음악을 만들겠습니다. 먼저 몇 가지만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첫째, 반론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러나 음악 외적인 이유, 예컨대 저보다 선배라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인한 그런 건 안됩니다. 둘째, 연주할 곡목은 제가 선정한 뒤 여러분의 찬반을 구해 결정합니다. 셋째, 이건 좀 치사한 부탁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공연에서 여기 나경이가 제 작품을 연주할 겁니다. 귀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의 있습니까?”
다시 보면대 두드리는 소리.
“좋습니다. 공연 프로그램을 짜겠습니다. 먼저 통상적인 관례에 따라 서곡, 협주곡, 휴식 후 교향곡 또는 협주곡의 순서로 잡겠습니다. 누구 작품으로 할까요? 우리 악단의 규모로 보아 19세기 작품은 어려울 것 같은데.”
“모차르트로 하죠!”
어느 틈에 1바이올린 수석 자리에 가서 앉아 있던 지네트가 선수를 쳤다. 모차르트 연구를 많이 한 정우의 역량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창립자이자 물주의 말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그럼 곡목을 제안하겠습니다. 첫 곡은 ‘극장지배인’ 서곡으로 갑니다. 축제풍이고 구조가 단순하여 컨디션 잡기 좋은 곡입니다. 두 번째 곡에는 제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넣겠습니다. 솔로는 여기 최나경이 담당하겠습니다.”
“어머!”
나경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휴식 후 세 번째 곡은 교향곡이나 규모가 큰 협주곡을 하는 것이 좋겠는데, 모차르트의 39번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20번 K.466 중 하나를 할까 합니다. 어떤 것을 할까요? 이런, 표정들을 보니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들 제 피아노에 아직 미련을 남기고 계시군요. 뭐 하죠 그럼. 피아노 협주곡 20번으로 대미를 장식하겠습니다.”
다시 보면대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일요일 두 시에 여기 모여 연습 시작합니다. 콘서트마스터!”
“예, 감독님!”
지네트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악보 복사해서 나눠주고 연습에 차질 없도록 조치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자. 오늘은 이만 해산합시다.”
정우가 지휘대에서 내려섰다. 지네트가 펄쩍 뛰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멋져, 멋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넌 카리스마가 있어.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늘 하는 얘기지만 넌 역시 건방진 모습이 어울려.”
“저, 정우야.”
그때 나경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왜?”
“너, 공개적으로 나 개 쪽 줄 일 있어?”
“그럴 리가 없지. 뭔 소리야?”
“아까 오면서 말했잖아. 나, 소정이 앞에서 연주할 자신 없다고. 나, 같이 하겠다고 한 거, 오케스트라 단원 하겠단 말이었어. 그런데 협주곡 솔로를 하라고? 난 못해. 너도 내 실력 알잖아?”
걱정스러운 나경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정우의 대답은 태연했다.
“너, 참 걱정도 팔자다. 그런 이유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 안 되게 생겼어?”
정우가 나경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난 네 연주 나쁘다고 생각 안 한다고. 네 연주에는 장점이 아주 많아. 난 협주곡 작곡할 때 바로 그 장점들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어. 걱정 마. 나만 믿어.”
“그 협주곡, 나도 좀 보면 안 되겠니?”
지네트가 부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물론. 여기 있어.”
“고마워.”
지네트가 나경에게서 악보를 받아 읽었다. 얼굴 빛이 살짝 바뀌었다.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지네트가 악보를 나경에게 돌려주고 말했다.
“디누. 나도 협주곡 하나 써줄래?”
“아니.”
정우가 뜻밖에도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단칼에 자를 건 없잖아? 알았어. 괜한 부탁 했나 봐.”
“그런 뜻이 아니야, 기분 나쁘게 듣지 마. 너하고는 협주곡이 아니라 이중주 소나타를 준비하고 있어.”
“그래. 그렇겠지.”
지네트가 조금은 위로 받은 듯, 그러나 여전히 실망을 감추지 못한 듯 묘한 얼굴을 지었다.
나경이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애써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건방 그만 떨고, 햄버거나 먹으러 가. 나 배고파서 실신하기 직전이야.”
“그래. 지네트는?”
“좋아.”
그들은 강당을 나와 어두워진 평창동 거리를 걸었다. 나경은 분위기를 바꿔 보려 계속 재잘거렸고, 정우는 어색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지네트는 파랗게 눈에서 불꽃을 튀기며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북한산의 스카이라인이 장엄하게 어두워 가는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